정태성 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1879년 독일 울름(Ulm)에서 태어난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말 배우는 것이 늦었고 세 살이 되도록 말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독일어가 어눌했으며 약간의 자폐성 증상이 있어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혼자 재미없게 노는 아인슈타인을 본 그의 아버지는 아인슈타인에게 놀이기구로 나침반을 사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나침반을 가지고 놀면서 바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신비함을 느꼈다.

학창 시절 아인슈타인은 학업 성적이 좋지 못했다. 독일의 경우 학생들을 담당하는 선생은 그 학생을 인문계로 보낼지 직업학교로 보낼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결정권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담임은 성적 기록부에 아인슈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아이는 추후에 어떤 것을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아인슈타인의 성적 기록부를 본 그의 어머니는 아인슈타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장점이 있을 거야. 이 세상에는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 길을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아인슈타인이 남보다 모든 것을 잘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저 평범하면서도 남과 다른 재능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음악을 좋아했던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처음에 아인슈타인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유럽에서는 음악으로 성공할 수 있기 길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처음에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1년 정도 배우다가 그만두어 버렸다. 그의 어머니는 아인슈타인에게 더 이상 음악을 강요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후 아인슈타인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때 다시 어머니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이 열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집에 막스라는 의대생이 목요일마다 방문했다. 이는 유대인의 전통으로 가난한 대학생을 조금씩 지원하는 관습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아버지는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막스에게 약간의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막스는 자연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자연히 아인슈타인은 막스로부터 과학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막스는 아인슈타인이 과학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20권이 넘는 자연과학 시리즈 책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과학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막스는 아인슈타인이 12살이 되었을 때 함께 유클리드의 원론을 읽으며 아인슈타인이 기하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아인슈타인이 16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의 사업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그의 가족은 독일에서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이주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학교를 위해 혼자 뮌헨에 남았으나 언어와 역사를 비롯한 많은 과목에서 성적이 좋지 않아 학교를 중퇴했다. 그리고 학교를 떠나 밀라노로 갔다.

아인슈타인은 밀라노에서 대학을 가려고 했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기에 입학을 할 수 없었다. 다시 스위스의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에 지원했으나 역시 졸업장이 없어 떨어졌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수학 성적을 주목한 이 대학의 학장은 고등학교에서 1년을 더 공부하는 조건으로 조건부 입학 허가를 허락했다. 아인슈타인은 페스탈로치가 설립한 고등학교에서 1년간 공부를 하고 난 후 취리히 연방 공대에 들어갔다.

대학 시절 아인슈타인은 강의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들과 토론하며 즐겁게 보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보다가 호기심이 생기면 본인이 상상하는 주제에 대해 스스로 빠져들어 깊게 생각하곤 했다.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사람이 빛의 속도로 날아가면 어떤 일이 생길까?’ 하는 의심이 들었고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펴며 혼자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 시절의 성적이 너무 좋지 않아 취직할 수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보험회사에 취업했으나 바로 해고되었다. 그러다 친한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스위스 베른에 있는 특허청에 간신히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일종의 낙하산 취업인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에서 일하는 동안 그가 생각하고 있던 빛의 속도로 일정하게 운동하는 것에 대해 더욱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상상을 자신만의 논리로 구체화하여 논문을 작성했다. 이 논문이 바로 1905년에 발표된 특수상대성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을 계기로 그동안 인류의 300년을 지배해 왔던 뉴턴의 절대주의 세계관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인류를 새로운 패러다임인 상대주의 세계관으로 이끌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이었기에 세계대전의 포화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다. 아인슈타인이 말년을 보낸 프린스턴 대학의 고등과학원(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ies)은 현재 전 세계 최고의 천재들이 모여서 연구하는 곳이 되었다.

우리의 인생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어릴 적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아인슈타인은 미국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인류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최고의 인물(The person of the century)이었다.

 

 

| 정태성(한신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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