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성 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폴란드 토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열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이후 그는 외삼촌인 루카스 바첸로데의 밑에서 자랐습니다. 외삼촌은 성직자이자 학자로서 코페르니쿠스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18살이 되던 해인 1491년 크라쿠프 대학을 다니던 중 천문학에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폴란드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서 더 많은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그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1496년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자유로운 토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학문에 대한 요구가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천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대부터 율리우스력이 달력을 만드는 기준으로 사용되어 왔지만 많은 시간이 경과되면서 오차가 누적되었습니다. 또한, 14세기 이후 항해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정확한 달력을 만드는 것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러한 달력은 천문학의 발전에 의해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대학에서 수학, 철학, 천문학 등을 공부하였고, 그곳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비판적이었던 도미니크 노바라 교수의 영향을 받습니다.

28살이 되던 해인 1501년 그는 파도바 대학으로 옮겨 의학을 배웠고 1503년 페라라 대학에서 교회법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중,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인 아리스타르코스를 알게 됩니다. 아르키메데스가 쓴 책을 읽던 중, 그 안에 있던 아리스타르코스의 업적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아리스타르코스는 아주 오래전인 기원적 3세기의 사람으로 그는 지구를 포함한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고대 사람들은 태양중심설을 무시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타르코스의 이론을 마음 깊이 간직한 채 이탈리아의 유학을 끝내게 됩니다.

1506년 코페르니쿠스는 고국 폴란드로 돌아와 성당의 참사원이 됩니다. 그가 참사원이 되는 데 있어서는 외삼촌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512년 외삼촌이 사망하자 코페르니쿠스는 동프로이센의 프라우엔부르크 대성당의 참사원으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천체의 운행에 대해 자신이 직접 관측하고 계산한 자료를 토대로 새로운 천문학 체계를 구상하게 됩니다. 시간이 있는 날에는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천문학 서적을 읽어 나갔습니다. 또한, 저녁 하늘을 관찰하기 위해 성당 건물의 옥상에 개인용 천문대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문헌이나 관측을 통해 확보한 자료를 분석해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천동설에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 당시의 천동설로는 천문학의 여러 가지 새로운 현상들을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천동설에는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주전원이나 이심과 같은 것을 도입했습니다. , 행성은 천구 상의 한 점을 중심으로 작은 원형 궤도인 주전원을 따라 운동을 하며, 행성 운동의 중심점은 지구를 조금 벗어난 이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새로운 관찰 결과가 나올 때마다 주전원의 수가 계속 증가하는 것을 보고 코페르니쿠스는 우주가 이렇게 복잡하게 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코페르니쿠스는 행성의 운동을 보다 수학적으로 간단하게 서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던 중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운동하는 천동설이 아닌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나 다른 행성이 운동을 하는 태양중심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그가 접했던 그리스의 아리스타르코스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중심으로 다른 행성들의 운동을 계산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복잡했던 주전원이 전혀 필요 없게 되었고, 결국 그는 지동설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며 모든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오래도록 유지되었던 천동설이 무너지고 지동설이 탄생하게 됩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사진출처 위키백과)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사진출처 위키백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지구를 주위로 한 행성들의 순서와 주기에 관한 것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는 지구가 중심에 있고 수성, 금성, 태양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는데, 수성, 금성 그리고 태양이 지구 주위를 운동하는 주기가 모두 1년 정도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둘째는 내행성과 태양 사이의 거리에 관한 것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서는 태양을 중심으로 내행성의 궤도가 완전히 지구의 궤도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지구에서 봤을 때 태양과 행성 사이에는 최대 이각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프톨레미오스의 체계에서는 태양과 내행성이 지구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운동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셋째는 행성의 역행운동입니다. 코페르니쿠스의 구조에서는 역행운동이 간단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반면 프톨레미오스의 체계에서는 수많은 주전원을 억지로 조합해야만 가능해지게 됩니다.

넷째는 프톨레미오스의 이론에서는 지구에서 관찰했을 때 행성이 지구 주위를 도는 주기가 항상 일정하지 않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서는 지구가 태양을 돌고 다른 행성도 태양을 돌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중심설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이론을 정리한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을 쓰게 되었고 그가 죽은 직후인 1543년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출판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2천 년간 인간의 사고를 지배해 왔던 지구중심설의 세계관이었던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게 됩니다. 이를 흔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큰 혁명이 되었습니다.

 

| 정태성(한신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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