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헌의 ‘아름다운 베르네川’

하루아침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계절을 재촉하는 빗소리가 후드득~ 후드득~ 음표를 달고 오선지를 넘나든다. 지난여름의 활기찬 기운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제법 세차게 내렸다. 대지를 씻어내는 가을비에 머릿속을 말끔히 비워내고 싶지만, 마음 한 자락이 허전하다. 우리나라의 여름과 겨울은 극단적이어서 불편하다. 지나치게 더워서 헐떡이게 하고, 살을 에는 추위가 움츠리게 한다. 가을 날씨는 요란하지 않고 느긋하면서도 푼푼해서 좋다. 베르네천에도 가을이 찾아와 깊어가고 있다.

 

가을빛이 짙어가는 베르네천
가을빛이 짙어가는 베르네천

 

하늘이 높아지더니 계절이 영글었다. 10월은 예부터 신에게 햇곡식을 드리기에 가장 좋은 달이라는 뜻으로 상달이라고 불렀다. 이때쯤, 산과 들로 나가면 풋내나던 햇것마다 토실토실 살이 오르고 때깔도 곱다. 곡식과 과일이 조잘거리며 익어가고, 수런수런 속삭이는 소리가 정겹다. 살진 메뚜기도 몸짓언어로 한철을 즐긴다. 들판을 휘뚜루마뚜루 달리며 꿰미 가득 메뚜기를 꿰던 유년의 가을도 풍요로웠다.

가을은 제 빛깔로 사는 뭇 생명들에게도 웅숭깊은 계절이다. 지난 계절 내내 뜨거웠던 긴장감을 내려놓고 잠시나마 여유를 찾아 마음속에 여백 만들기 좋다. 바람이 대지를 색칠하기 시작했다. 찬 기운이 오소소 느껴지는 산책길을 걷는데 영롱한 이슬이 반긴다. 거미그물에 조롱조롱 맺힌 이슬도 햇살에 반짝거렸다. 폭우에 할큄 당한 상처가 아물지 않은 베르네천을 흐르는 물소리가 순해졌다. 애써 계절을 읽는다. 찌들고 눌어붙어 답답함을 잊고, 털어내지 못한 온갖 상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호랑거미가 그물을 쳐놓고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모습
호랑거미가 그물을 쳐놓고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모습

 

소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라고 썼다. 무성했던 초목이 하루가 다르게 알록달록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베르네천 천변에 자라는 벚나무가 물감을 짙게 풀어 이파리마다 붓질한다. 만물이 무르익고 농밀해지는 계절, 여름과 겨울 사이를 이어주는 짧은 날들이 존재했었나 싶게 아쉬운 계절이 가을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가슴앓이 하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로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지만, 변함없이 찾아온 계절의 질서가 고맙기만 하다. 대자연의 섭리 앞에 인간의 나약함과 왜소함을 새삼 깨달으며 숙연해진다. 가을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저물녘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아름다운 노을은 역설적인 위안이 되기도 한다. 가을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외로움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을 탄다.’라는 말은 묘한 감정마저 불러일으킨다. 나뭇잎에 단풍이 들면 사람의 마음도 차츰 물이 든다.

 

가을을 알리는 억새의 꽃이 팼다.
가을을 알리는 억새의 꽃이 팼다.

 

가을에 피는 꽃을 보면 우리네 삶처럼 쓸쓸해 보인다. 하늘거리는 모습에는 가녀리고 짠한 애틋함이 스며있다. 따사로운 태양이 아껴두었던 색을 골고루 나누어 주는 계절. 붉은 맨드라미와 샐비어. 노란 은행잎과 국화, 연보라색 쑥부쟁이와 하얀 구절초, 투명한 하늘빛과 변화무상한 구름도 가을을 맞았다. 마음 자락도 유순해져 계절이 안겨 주는 쓸쓸함이 자리를 잡는다. 온갖 사물 뒤에 숨어있던 본질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눅눅했던 몸과 마음을 청량한 바람이 보드랍게 말려 준다.

풀벌레는 가을을 사람보다 먼저 알아차린다. 밤새우는 사랑 노래도 처량하게 들린다. ‘귀뚜라미는 가난한 자의 온도계라는 미국 속담이 있다. 뒤미처 다가오는 추위를 대비하라는 메시지다. 아메리칸 인디언은 귀뚜라미 소리로 계절과 온도를 짐작하였고, 다가올 추위를 미리 대비하였다. 베짱이도 계절에 맞춰 갈색 옷으로 바꿔 입은 지 오래다. 풀벌레 소리가 소슬하게 문지방을 넘어오면 찬 바람이 자늑자늑 불어와 마음을 헛헛하게 헤집어놓는다. 가을은 자연에 순응하는 미물을 통해서도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숨탄것들의 짧은 삶이 애처로워 마음을 다잡는다.

 

강아지풀에 맺힌 투명한 이슬방울이 아침햇살에 빛난다.
강아지풀에 맺힌 투명한 이슬방울이 아침햇살에 빛난다.

 

올해 가을은 어수선하고 아주 험상궂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빚은 불편한 뉴스가 연일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북한은 여전히 핵을 앞세우며 으름장을 놓는다. 금리와 환율, 무역 적자와 물가 상승에 발목 잡힌 나라 경제가 위태롭다. 좀체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다. 코로나19를 겪었던 상심을 보듬어 다독이고, 태풍이 남긴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았다. 정치꾼들의 볼썽사나운 정쟁과 작태는 한심하기 그지없다. 민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타협과 협치는 물 건너간 지 오래다. 오만방자한 진흙탕 싸움이 정치 혐오를 부추긴다. 현실의 삶도 갈수록 피폐해지고 힘에 부친다.

가을은 겸손을 배우기 좋은 계절이다. 이 가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이 많다. 시인은 몇 편의 시를 쓸 것이다. 자연과 예술을 찾아 교감하고 마음의 안정과 위로를 얻는 것도 중요하다. 사랑이 메마른 적막함은 황량하다. 가을이 문턱을 넘자 계절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가을비가 내리는 날, 우산 속을 혼자 걸으면 운치 없고 외로워 보인다. 메마른 정서를 일깨워 성숙하게 하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기 때문이다.

 

베르네천 인근 아파트의 화살나무
베르네천 인근 아파트의 화살나무

 

가을을 누가 데려왔을까. 애틋한 추억이 숨어 있는 계절. 가을을 문장부호로 쓴다면 느낌표와 물음표가 아닐까 싶다. 풍요로운 자연을 보고 느끼면서 떠올리는 생각이 많아진다. 은혜와 감사, 결실과 수확, 존경과 기도와 사색이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인간의 추악한 이기심과 질서를 떠올릴 때면 생각조차 안타깝다. 자연의 질서에 역행하는 인간의 양철지붕처럼 얍삽한 속내가 불편하다. 쉼표 찍기도 가을의 언어다.

거짓말하지 않는 자연의 질서는 늘 아름답다. 가을은 총총걸음으로 왔다가 잰걸음으로 지나간다. 공기는 유난히 맑고 친근한 냄새를 품었다. 청춘을 혼미하게 하는 짙은 향기도 없고, 뭇 마음을 훔치는 지분 냄새도 아니다. 시끌벅적 요란한 세속의 잡다함도 멀리하여 허물과 번뇌까지 벗어버린 냄새다. 완숙하게 발효되어 청정하다.

 

베르네천에서 바라본 맑은 가을하늘
베르네천에서 바라본 맑은 가을하늘

 

베르네천에서 계절의 정취에 흠뻑 젖어보는 것도 좋겠다. 감사를 떠올리며 자박자박 걷기에 좋다. 곧이어 바람의 계절 겨울이다. 들꽃처럼 수런거리는 삶의 얘기가 도란도란 엮어지는 계절. 시기와 질투라는 단어를 잊고 공감과 치유를 떠올리고 싶다. 정갈한 마음으로 계절을 만끽하련다. 당신의 가을은 안녕하신가요.

 

| 김태헌(수필가, 한국공무원문인협회 사무국장)

 

김태헌 수필가
김태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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