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명화로 보는 색채심리’ 22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는 정열적인 색채로 인간의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한 낭만파의 수장이었다. 그가 1831년에 그린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728은 역사의 주체는 결국 시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세기의 걸작이다. 필자는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을 찾은 적이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자화상 (1837년)
외젠 들라크루아의 자화상 (1837년)

 

고대 이집트인은 죽어서 사후세계에 잠시 갔다가 그 몸으로 부활한다고 믿었다. 영원한 삶을 위하여 시신을 미라로 만드는 장례문화가 생겼다. 고인의 시신을 과실주로 깨끗이 닦아서 장기를 제거하고 40여 일 동안 각종 향신료에 절여 염을 한 후 몸에 부재료를 넣고 방부제 역할을 하는 역청(瀝靑)’을 바른 천으로 꽁꽁 감쌌다. 미라의 영어 단어인 머미(Mummy)는 페르시아어(현재의 이란어)역청을 의미하는 (Mum)’ 또는 머미아(Mumiya)'에서 유래했다.

미라 가루는 만병통치약과 건강보충제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의사들은 역청 성분이 있는 미라의 질병 치료 효과를 믿었다. 12세기 초, 유럽 사회는 페르시아와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에 의해 전파된 미라에 열광했다. 미라 가루 한 줌은 병든 환자를 일으키는 신비한 생명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한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도 미라 가루를 지혈제로 애용했다. 당대 유럽인들은 미라를 갈아서 약재로 만들고, 남은 가루를 포도주에 섞어 마셨다.

 

18세기 약국용 미이라 용기
18세기 약국용 미이라 용기

 

16세기에 약제사들은 미라 가루로 진한 갈색의 머미 브라운 물감을 만들었다. 사람의 피부색과 명암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어서 화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도굴한 미라는 약재와 물감만이 아니라 텃밭의 비료와 증기기관의 땔감으로도 사용하였다. 미라의 폭발적인 수요에 매장량은 바닥을 드러냈다. 유통업자는 사형수와 노예, 병든 시신과 동물 사체까지도 비밀리에 사들여 가짜 미라를 만들었다. 19세기 말, 머미 브라운은 사라졌다. 윤리적인 문제보다 원료의 부족 때문이었다.

프랑스에 희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1816, 군함을 이끌어 본 적이 없는 쇼마레 백작은 왕을 돈으로 매수하여 함장이 되었다. ‘메두사호에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세네갈로 가는 이주민과 군인 400여 명이 정원을 초과하여 타고 있었다. 군함은 항해 2주 만에 좌초되었다. 함장과 고급 관리 250여 명은 6대의 구명보트를 타고 도망쳤고, 남은 150명은 군함의 판자를 뜯어 급하게 뗏목을 만들었다. 표류 사흘째, 폭풍우가 휘몰아친 뗏목은 아비규환이었다. 물도 없이 죽음의 공포에 떨던 사람들은 인육을 먹으며 뜨거운 태양 아래서 미쳐갔다. 표류 15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지만, 생존자는 단 15명이었다. 살아남은 자들도 정신착란으로 평생 고통받았다. 왕은 이 사실을 쉬쉬하며 은폐했다. 생존자인 외과 의사 앙리 사비니가 참혹상을 적은 글을 발표했다.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프랑스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8~1819, 캔버스에 유채, 490.2x716.3cm, 루브르 박물관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8~1819, 캔버스에 유채, 490.2x716.3cm, 루브르 박물관

 

1819년 이 소식을 접한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는 작품 메두사의 뗏목을 그렸다. 그는 부패한 왕정을 고발하고 그림 속에 옷을 흔드는 사람을 통해 희망을 표현했다. 들라크루아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프랑스 사회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지닌 화가이며, 자기의 생각을 여러 매체에 기고한 뛰어난 작가였다. 그는 7월 혁명을 주제로 260×325cm의 대작을 구상하면서 제리코의 작품을 모태로 삼았다.

18307, 프랑스의 왕 샤를 10세가 입헌군주제를 거부하고 왕정 복귀를 시도하자 이에 반발한 시민들이 3일 동안 혁명을 일으켰다. 화가는 7월 혁명 중 가장 격렬했던 두 번째 날을 그림에 담았다. 머미 브라운(Mummy Brown)을 사용한 이 작품은 포연이 자욱하게 퍼지는 파리 시내를 자유의 여신이 화약으로 얼룩진 가슴을 드러낸 채 시민군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무기를 들었고, 왼손에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기를 높이 흔들고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7월 28일」, 1830년, 캔버스에 유채, 260x325cm, 루브르 박물관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7월 28일」, 1830년, 캔버스에 유채, 260x325cm, 루브르 박물관

 

혁명이 각 계층의 고른 지지를 받았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어린 소년도 죽은 근위병의 권총을 들었고, 검은 정장 차림의 부르주아도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장총을 불끈 쥐고 있다. 그 옆에 노동자를 상징하는 하얀 셔츠를 풀어 헤친 청년이 두 손에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림 하단에 왕의 근위병과 시민, 병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다. 혁명은 많은 희생으로 쟁취하였음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1830년 샤를 10세는 영국으로 망명하고, 7월 혁명 때 시민왕이라고 불렸던 루이 필립이 왕으로 등극했다. 신왕조는 시민이 혁명의 주인임을 뜻하는 이 작품을 궁전 박물관에 걸었지만, 여전히 민중을 옥죄며 삼색기의 정신을 저버렸다.

19세기 낭만주의 화가들이 열광했던 색상, 미라 가루가 모든 질병의 치료제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1881, 화가 에드워드 번 존스는 우연히 자신이 사용하던 물감이 미라를 갈아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에 빠졌다. 갖고 있던 모든 머미 브라운을 땅에 파묻어버렸다. 결국, 이 색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화학 물감으로 대체되었다.

 

카타르 국기
카타르 국기

 

202211FIFA 월드컵이 카타르에서 열린다. 페르시아만에 있는 작은 나라 카타르의 국기 색상은 머미 브라운 계통의 진한 갈색과 톱니바퀴 모양의 흰색이다. 여기에서 갈색은 19세기 일어났던 독립전쟁의 상흔과 해방에 대한 열망을 나타낸다. 카타르는 바레인의 속국이었다. 양국 간의 끊임없는 유혈사태로 갈등이 깊어지자 영국군이 개입하여 조약을 체결하였다. 1868년 바레인은 카타르의 영토 통치권을 포기했다.

머미 브라운은 자연과 대지처럼 사물을 품어주는 색깔이다. 바라보기만 해도 내 편이 되어주는 엄마의 품처럼 따뜻하다. 포근함과 아늑함을 주는 색상으로 거실이나 휴게 공간을 꾸미면 긴장이 완화되어 편안한 분위기를 풍긴다. 원목 소재의 가구나 소품으로도 쉽게 연출할 수 있다. 소품에 진한 갈색을 배치하면, 작은 변화만으로도 지친 몸과 마음에 에너지를 얻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색상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생기가 사라지고 지루해 보인다. 따분하고 고집이 세며 비타협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깊어가는 가을,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머미 브라운을 생각하며 진한 갈색으로 물든 낙엽을 바라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대지의 색은 뒤숭숭한 환경에서도 나를 깊이 품어주는 위로의 선물이다.

 

| 김애란(화가, 미술 심리 강사)

외젠 들라크루아, 단테의 배 , 1822, 189x246cm, 캔버스에 유채
외젠 들라크루아, 단테의 배 , 1822, 189x246cm, 캔버스에 유채
외젠 들라크루아, 사르디나팔루스의 죽음 , 1827, 392x496cm, 캔버스에 유채
외젠 들라크루아, 사르디나팔루스의 죽음 , 1827, 392x496cm, 캔버스에 유채
외젠 들라크루아, 히오스 섬의 학살, 1823~1824, 419X354cm, 캔버스에 유채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