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의 설립과 활동 23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천군이 만들어졌는데 현재의 부천시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부천군은 현재 서해안에 있는 덕적도, 영종도(용유도와 결합), 대부도, 영흥도 등의 섬뿐만 아니라 인천시의 서구, 남동구, 계양구, 주안, 문학 등을 포함해서 남으로는 시흥의 소래, 동쪽으로는 서울의 개봉동과 오류동을 포함한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지금의 부천시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넓었습니다. 부천군은 육지에 9개면, 섬에 6개면 등 총 15개 면으로 구성되어 탄생하였습니다. 부천군이 인천부를 감싸고 있어서 생활권과 경제권이 인천과 겹치지만 일제의 행정에 의해 15개면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종합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현재의 부천시 관내를 중심으로 오정면과 계남면(후에 소사면으로 개칭)에서 이루어졌던 일들과 인물 그리고 시대적 모습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좀 더 확장하여 일제 강점기 당시 부천군 면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면장 또한 부천군수처럼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임명되었기 때문에 일제의 조선 지배를 자발적으로 동의하였고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행위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볼 수 있습니다. 군수와 함께 최일선에서 상부기관의 결정사항을 집행하였고, 특히 일제가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 등 세계2차대전을 수행할 당시 면장의 역할은 징용, 징병, 식량 공출 등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친일 행위의 무게는 가볍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부천군 면장들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일반적으로 면장의 임기가 매우 깁니다.

현재 면장은 5급 공무원으로 임기가 짧으며 순환 보직으로 계속 이동합니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연속으로 10년을 넘게 하는 면장들이 많았으며 그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서곶면장이었던 정태국은 무려 16(1921~1936)을 하였습니다. 영종면장 박원상은 13(1925~1937), 대부면장 김완수 12(1928~1939), 소래면장 이도영은 12(1922~1934), 부내면장 조구현은 12(1922~1933)을 하였습니다. 문학면장 김두현은 11(1919~1929), 계양면장 강석조는 10(1923~1932), 오정면장 변영모 10(1931~1939) 10년 이하 면장은 짧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오래 면장을 역임한 사람 중에 특이한 사람은 용유면장 조종악이었습니다. 1921년부터 1926년까지 6년을 하다가 조석교에 4년 넘긴 후 1931년부터 1939년까지 9년을 해서 총 15년 동안 면장을 하였습니다.

 

둘째, 면장은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이익을 추구한 동업자였습니다.

19334월 소사금융조합장 선출을 위한 선거에서 원영상과 이도영은 치열한 득표전을 펼칩니다. 1932년 당시 소사면장은 원영상, 소래면장은 이도영이었는데 李元兩派對立...(이원양파로 대립)’이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두 면장은 치열한 선거전으로 개표결과 똑같이 17표를 얻게 되는데, 동수 득표로 연장자인 이도영이 조합장에 당선되자, 패자 측인 원영상의 불평으로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1933420일 매일신보)
대부면장이었던 김완수는 10년 근속 기념으로 1937년에 축하연이 이루어집니다. 이 행사에 부천군수 허섭, 판사 김세완, 인천경찰서장뿐만 아니라 남동면장 오혁근(1929~1939)도 참석하여 공적에 대한 축사를 하였습니다.

 

 

셋째, 지금과 다르게 면장을 하면서 겸업과 친일단체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각종 위원회에 해당하는 단체들에 이름을 많이 올렸습니다. 특히 경제적 이익이 되는 금융조합과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부천유도회, 부평명도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름을 올렸습니다. 소사면장 원영상은 소사금융조합장, 여자청년단 단장, 부천유도회 평의원 등에 이름을 올렸으며, 대부면장 김완수는 부천통운조합 조합장을 겸임하였고, 남동면장 오혁근은 주안금융조합 평의원을 하였습니다.

 

넷째, 부천군 면장임에도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북도면장 이중화(李重華)(1933~34) 입니다.

이중화는 18932월 인천에서 태어났으며 1915년 조선총독부 순사보로 임명되자마자 조선총독부 경관연습소에 입소하여 같은 해 9월 수료하였습니다. 191812월 경기도 인천경찰서 영종주재소 순사보로 근무하다 19198월 순사로 승진하였습니다. 19203월 경기도 인천경찰서로 옮겨 고등계 형사로 활동하였으며, 고등계 형사로 근무할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한 이재연을 체포 취조하였으며, 192410월에는 고려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국내에 들어와 경성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한 이대정, 이창회 등을 체포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독서회사건 관련자인 김수복을 체포하여 취조하였으며, 1926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한 윤응렴을 체포, 고문하였습니다. 1932년에는 인천에서 노동자청년단 단원으로 활동한 박수복, 권희일, 권평곤 등을 검거하여 고문한 끝에 박수복을 사망케 하였습니다. 이처럼 북도면장이 되기 전 순사로서 독립운동가를 체포한 악질 친일파였습니다.

앞으로 15개면 군수들의 행위를 통해 시대상을 살펴보겠습니다.

 

|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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