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 저녁 7, 부천시민 70여 명이 중동 롯데시네마에서 구자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태안을 관람했습니다. 이번 상영은 한국전쟁 당시 국가 공권력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의 실체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추진되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를 비롯한 17개의 시민사회, 노동, 정당 단체들이 참여했으며 상영 후에는 감독과의 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구자환 감독은 6·25 전쟁 당시에 벌어진 국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영화를 통해 알리고 있으며, 지금까지 레드툼(2013), 해원(2017), 태안(2020) 등을 제작했습니다.

 

영화 태안 포스터
영화 태안 포스터

 

영화 태안은 충청남도 태안군에서 이루어졌던 민간인학살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로 유명 관광지로 알려진 태안이 품고 있는 가슴 아픈 역사를 말해줍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충남 태안에서는 경찰에 의해 115명의 국민보도연맹원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국민보도연맹이란 1948, 이승만 정부가 과거 일제 치하에서 좌익계 독립운동을 했거나 광복 후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던 모든 정당, 사회단체 인사와 그 가족 지인 등을 사상 개조명분으로 가입하게 했던 단체입니다.

비극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15명의 국민보도연맹원이 학살당한 후, 태안을 점령한 인민군은 반동분자를 처단한다는 이유로 116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인민군이 퇴각하자 경찰은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혐의를 씌워 다시 1,000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합니다.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부른 것입니다. 모두 세 차례에 걸쳐 1,200여 명의 민간인이 경찰과 인민군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사기실재를 비롯하여 태안군에만 학살터가 20여 곳이 넘는다고 하니 태안 전역이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빨갱이로 몰려 사망한 피해자 유족들은 그 슬픔과 억울함을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감시당했고 빨갱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연좌제에 걸리지 않기 위해 침묵하며 한() 많은 세월을 견뎌야 했습니다. 민간인 학살 사건의 본질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가 오히려 죄 없는 국민을 불법적으로 살해한 것임에도 지금껏 피해자의 명예는 회복되지 못했고, 유족들은 온갖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왔습니다.

왜곡되고 굴곡진 역사는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서 조금씩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20055,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되고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면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뿐만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 해외동포사, 권위주의 통치 시에 일어났던 다양한 인권침해,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등이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감독과의 대화
감독과의 대화
기념촬영
기념촬영

 

영화를 보는 동안 줄곧 한 사람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바로 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서막을 연 내무장관 백성욱입니다. 먼저 백성욱의 일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1897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1910년 정릉 봉국사 최하옹 대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습니다. 1919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신문 사원으로 일했습니다. 같은 해 프랑스 파리로 유학해서 파리 보배(Beauvais)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25,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이승만을 도와 정부 수립 운동에 참여했으며, 1948년부터 1949년까지 동국대학교 교수, 1950년에는 내무부 장관, 그리고 1951년에는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을 지냈습니다.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제2대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1962년에는 부천 소사동에 백성목장이라는 금강경 수행도량을 개설하고 사망 직전까지 약 20년간 부천에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이력 때문인지 백성욱은 다시 찾은 부천 인물(부천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2013연구자료)이라는 책자에 소개되고 있고, 소사역 지하보도에는 소사를 빛낸 인물로 펄벅, 정지용, 목일신 등과 함께 그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습니다.

 

부천 소사를 빛낸 인물들 코너에 소개된 백성욱
부천 소사를 빛낸 인물들 코너에 소개된 백성욱

 

백성욱이 독립운동가로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상해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의 사원으로 활동했던 이력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95027일부터 717일까지, 6·25전쟁 전후로 5개월간 맡았던 내무부장관 시절의 행적은 다시 살펴봐야 할 부분입니다.

<충남 서부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 보고서>를 보면, 1950625일 치안국장 명의로 전국 각 시도 경찰국장에게 내려진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에 의해 충남 서부지역에서도 일제히 예비검속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요시찰인 수백 명이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살해되었습니다. 희생자 중 상당수는 좌익사상과는 무관한 단순 가입자이거나, 보도연맹이 무엇인지 모르고 가입한 농민들로 주로 2040대의 청장년층이었습니다. 이렇게 무고한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끌어다가 불법적으로 처형한 경찰의 최고 명령권자가 바로 부천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는 내무부장관 백성욱이었습니다.

당시 명령체계가 내무부장관 백성욱 내무부 치안국장 장석윤 충남경찰국장 이순구 각 급 경찰서장 각 지서주임 순이므로 내무부장관의 재가 없이는 결코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백성욱 내무부 장관의 과실이 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백성욱은 제4대 내무부 장관으로서 짧은 5개월의 임기 동안 일생에서 지울 수 없는 큰 오점을 남겼으며, 그런 백성욱을 부천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소개하고 찬양하는 것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는 일임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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