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강한 비바람이 잠을 설치게 하더니 새벽녘 태양이 곤지를 찍고 올라온다. 커피 한잔에 정신을 깨웠다. 나는 은숙이면서 은석이다. 두 기질이 상황 따라 역할을 달리한다. 핸드백을 맨 은숙이는 어린이집 현관문을 열며 상냥하게 안녕이라 외친다.

3살 승찬이는 엉덩이가 한 움큼 늘어져 오줌 향수를 뿌려댔다. 주말 동안 잘 놀았는지 내 손을 끄는 힘이 보통 아니다. 침으로 볼과 가슴에 사랑표시를 했다. 한 놈은 허벅지를 잡고 발등에 올라탔다. 양다리에 두 놈을 매달고 슬리퍼를 질질 끌어 미끄럼을 태웠다. 4살 시우가 편지를 썼다며 외계어가 난무한 종이를 준다. 시우만의 언어 번역기를 돌려 겨우 읽어냈다. 짓궂은 한 녀석을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고 다른 친구와 코키스를 하게 했다. 도망가는 녀석들을 쫓아 교실로 들어갔다. 핸드백은 시우가 메고 뒤따라 들어왔다. 은숙이 역할은 여기까지다.

어린이집에서의 활약은 은석이 몫이다. 아빠처럼 몸으로 노는 걸 좋아한다. 어린 친구들에게는 맞춤형 단짝 친구를 만들어준다. 까칠한 소영이가 등원하던 날, 세 번째 어린이집이란 엄마 말에 의욕이 불탔다. 설렘과 호기심의 시간. 은석인 소영에게 어떤 친구를 선물해 줄지 고민이 많았다. 두려움을 주면 불안해 적응이 더 힘들 거다. 예민한 친구는 관찰이 필수다. 울음소리는 도움의 부탁 인사다. 웃음은 감사 표현이다. 반복해 언어 번역기를 돌려 소영을 봤다. 점심시간 혀를 박박 닦아내며 울었다. 맛을 표현하는 소영이 눈빛이 반짝이고 외계어가 번역되어 소통된다. 미각이 예민한 아이였구나!. 매일 투명테이블에 음식이 차려졌다. 어제는 과일 장사. 오늘은 채소 장사를 만나 단짝 요리사 친구를 불러냈다. 말이 많아진 소영이가 깔깔거렸다. 까칠하고 말 없는 은숙이와 말썽꾸러기 은석이처럼 소영이도 늘 함께하는 친구가 생겨 기쁜 것 같았다.

얌전하던 은숙이가 말이 트이기 시작하면서 은석이의 기질이 나왔다. 5살 남짓이었나. 항아리 속에 머리가 끼었다. 작은 몸에서 다윗의 힘이 솟은 걸까. 낑낑대다가 항아리를 들고 일어섰다. 물 폭탄이 쏟아졌다. 단지를 뒤집어쓴 아기곰 한 마리가 우는 걸 본 엄마는 조용하면 사고를 친다고 볼기를 쳤다. 은석인 머리가 감고 싶었다고 지금도 말한다.

은석인 단골 외상 손님 물건을 빼앗아 돈 달라 울었다. 친구들과 놀던 언니가 울고 들어오는 날이면 뛰쳐나가 그들의 손등을 물거나, 쫓아가 때리기도 했다. 거친 호흡과 도끼눈으로 언니의 보안관 노릇을 했다. 옆집 남자아이의 짓궂은 장난에 두 주먹 불끈 쥐고 두 눈에 푸른 안경을 선물해버렸다. 아버지는 말 안 듣는 녀석은 망태 할아버지한테 보내야 한다고 했다. 은석이를 망태에 넣어 지게에 짊어지며 겁을 주기도 했다. 은숙이는 말썽부리고 매 맞는 게 싫었지만 은석이의 다짐은 하루를 못 갔다. 남의 말 듣기 싫어하는 고집불통에 꼴통이다. 은석이가 심심해하는 날이 은숙이가 놀 수 있는 날이다. 바느질하는 엄마 손놀림에 눈동자가 반짝였다. 바늘에 찔려도 아픈 줄 몰랐다. 엄마에게 동정 다는 것을 배우고 칭찬받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조각천으로 인형 옷과 이불을 만들다 엄마를 쳐다보며 웃었다. 엄마만 있으면 마냥 좋았다.

 

 

낮과 밤을 나눠 공생하는 우리 관계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던 사춘기 시절은 싸움도 잦았다. 학교 일진인 친구와 결전이 있던 날, 복도가 시끌시끌했다.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이 찾아와 머리 숙이라 조언했다. 고수는 몸으로 싸우지 않는다, 입으로 싸운다고 호언장담하는 은석이는 은숙이가 되어 도망치고 싶었다. 조용한 후문에 병풍이 쳐졌다. 친구에게 가방을 건네며 귓속말을 했다. 사실 살짝 쫄았다. 은숙이는 의기양양하게 친구들과 떡볶이집으로 향하는 은석일 때려주고 싶었다. 이기적이고 고집불통인 은석이로 입을 내미는 밤이면 우울동굴로 들어갔다. 은석이가 놀리는 듯한 어투로 은숙아, 인생 별거 없어. 사춘기면 너처럼 살아야 하니? 그럴 시간에 난 즐길 거다. 꿈은 개꿈이 좋아. 맘만 먹으면 언제든 꿀 수 있잖아. 융통성을 가져봐. 생각을 내려놓고 보면 길은 많아. 가슴 뛰는 사춘기다. 설레지 않니? 우린 건강하고 뭐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야. 못산다고 다 미래가 없는 건 아니잖아!.” 은숙이는 자유로운 영혼의 은석이라면 믿고 우울동굴을 나갈 수 있겠다는 힘이 생겼다. 은석이와 손잡은 동굴 밖 세상은 일상이 설렘이었다.

은석이 꿈은 여군이었다. 군인과 결혼 후,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며 은숙이를 들볶아 내조하라고 했다. 서로의 영역을 정해 선을 넘지 말란다. 은석인 이길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친구다. 나는 남편 중대원들의 음식을 차리고, 은석이는 회식의 벌이 되어 쏘아댔다.

 

 

연말 대대 회식이 있던 날, 마이크를 잡아 휴가증을 두고 전쟁이 시작됐다. 잽싸게 첫 마이크를 잡고 눈짓을 보내자 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은석이를 따라 의자 위로 올랐다. 요즘 남자 요즘 여자 전주가 흐르고 두 짝의 숟가락 캐스터네츠가 박자를 맞추면 목에 핏발선 은석이 노래가 시작됐다. 후렴 부 떼창과 함께 파도 춤이 일었다. 전우애를 불사르고 휴가증을 받아낸 대원들이 은석이에게 사랑합니다! 형수님을 날렸다. 은숙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은숙이는 집안을 은석인 세상을 가지는 게 맞다고 선을 긋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도 아침이면 거울 앞에서 다짐한다. 치마 대신 바지를, 군화 대신 구두를 신는 은숙이와 은석이. 문밖 전쟁터에선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며 은숙이를 두고 나가는 자신을 응원해 달라 말한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은석인 무섭게 달려드는 하이에나 같다.

씩씩하던 은석이가 우울하고 암울한 동굴에 들어갔다. 은숙이가 편지를 남겼다. ‘은석아, 미안해. 생각해 보니 넌 날 위해 살았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내가 널 위해 존재한 게 아니었네. 이제는 지친 널 위해 내가 힘이 될게. 돌아와 줘’. 진심은 전달될 거라 믿으며 매일 기다렸다. 답답하고 부끄럼과 수줍음이 많던 은숙이인 나. 고집 세고 멋대로 사는 자유로운 영혼의 꼴통 의리파 은석이인 나. 정체성은 화장실에 갈 때나 기억하자고. 산 정상에서 은숙이는 지친 은석이에게 맛난 커피를 선물했다. 은숙이에게 은석이는 삶의 축복이자 사랑의 힘이다.

 

| 함은숙(2022년 계간<에세이문예> 겨울호 수필 등단,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가정관리학과 졸업, 부천지역내 어린이집 원장 역임, ) 시민단체 운영실장)

함은숙 수필가
함은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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