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EOPLE

사백 년 전 미수(眉叟)가 걸었던 길을 / 사백 년 후 현해당이 걷는다 / 미수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남인의 영수 / 현해당은 가난한 시인 /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다른 길을 따라 / 미수가 미수의 길을 가듯 / 현해당은 현해당의 길을 가야지 / 산은 첩첩 날은 어두워 오는데

현해당 시인의 <미수의 길>이라는 시입니다. 미수는 조선 선조~숙종 연간을 살았던 학자이자 문신인 허목(許穆, 1595~1682) 선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저마다의 길이 있지요. 그 길은 앞의 누군가가 걸었던 길과 비슷하거나 또 뒤의 누군가가 걸을 길과 비슷할 수는 있지만 결코 같은 길은 아닙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물학적 운명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라,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지향하는 존재이니까요.

특히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은 누군가 걷다 포기한 것일 수도 있고, 또 아직 아무도 가보지 않은 것일 수도 있기에 외롭고 힘든 길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길 끝에 전인미답의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기에, 그 세계는 오로지 나만의 왕국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그들은 오늘도 묵묵히 제 길을 걸어갑니다. 미수가 미수의 길을 가고, 현해당이 현해당의 길을 가는 것처럼.

조춘제 작가는 꽃 그림을 주로 그리는데 그중에서도 해바라기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입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해바라기는 객체로서의 꽃이기도 하고, 춘제 씨 자신이기도 하고 또 제3의 무엇이기도 합니다. 정반합의 변증법적 사유구조가 그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죠.

올해 4, 조춘제 작가는 섬세하고 완성도가 뛰어날 뿐 아니라 채색화의 정통기법을 사용해 현대적이고 조형적 언어로 잘 표현해냈다” “독창적 색채감과 함께 소재의 대상을 새롭고 세심하게 표현해 작품성이 뛰어나다라는 심사평과 함께 부천미술-올해의 작가에 선정된 바 있습니다.

지난 3, ‘2022 부천미술-올해의 작가 춘제 씨, 해바라기』 展이 열리고 있는 송내어울마당 아리솔갤러리에서 조춘제 작가를 만나봤습니다.

 

조춘제 작가
조춘제 작가

 

안녕하세요! 콩나물신문 THE PEOPLE입니다. 바쁜 일정 중에서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조춘제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5, ‘부천미술-올해의 작가가선정 소식을 전할 때 뵌 후 벌써 6개월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부천미술 올해의 작가전에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고 순간의 기쁨과 동시에 긴 고민에 빠졌습니다. 지금까지의 작업이 자신과의 싸움이었다면 올해의 작가 초대전은 처음으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모든 약속과 일정을 접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두문불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지나온 그 시간들을 생각해보니 나에게 이런 열정이 있었던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6개월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라는 질문에 그림 그렸어요라고 가감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조춘제 作 「나의우주 나의영토」, 65×65cm, 장지에 분채. 석채, 2022-13
조춘제 作 「나의우주 나의영토」, 65×65cm, 장지에 분채. 석채, 2022-13

 

이번 ‘2022 부천미술-올해의 작가 춘제 씨, 해바라기에도 여전히 해바라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해바라기는 조춘제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지 말씀해 주세요.

2008년도에 그린 푸른 바탕의 해바라기 그림 제목이 불치의 병이었는데 그 그림 앞에 선 관객들의 반응이 반반으로 나뉘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관객들에게 제 마음이 그렇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해를 따라 도는 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고 태양꽃이라고도 불리지만 서로 근접할 수 없는 현실이 내 꿈과의 괴리처럼 여겨졌던 거 같습니다.

해바라기꽃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치유하고 희망을 품기 시작하였으니 지금의 해바라기꽃은 불치가 아니고 치유가 됐습니다. 제 그림을 마주하는 관객들도 제 의도가 전해져 좋은 기운을 받아 가면 좋겠습니다.

 

조춘제 作 「불치의 병」, 72.7×91cm, 장지에 분채, 2008,
조춘제 作 「불치의 병」, 72.7×91cm, 장지에 분채, 2008,

 

이번 전시회의 제목이 춘제 씨, 해바라기인데 가벼운 듯하면서도 뭔가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설명 부탁드립니다.

춘제 씨의 는 중의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는데 의존명사로서의 와 내가 만들어낸 자식 같은 해바라기 씨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작품 제목을 내 이름과 붙여 놓음으로써 책임 의식을 극도로 올려놓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겠다는 의지의 발상인 셈입니다.

재복(財福)을 상징하는 황금색 잎을 다 떼어버리고 꽃씨에 집착하면서 해바라기 꽃씨를 춘제 씨로 재창조했다는 시건방을 떤 전시 제목을 만들게 됐습니다.

 

조춘제 作 「마중」, 38×45.5cm, 장지에 분채, 2022
조춘제 作 「마중」, 38×45.5cm, 장지에 분채, 2022

 

부천 원종동에 오랫동안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화가로서 느끼기에 과거 원종동과 현재 원종동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요?

원종동은 전원과 도심이 함께 공존하고 있어서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고 힐링하기에도 좋은 동네입니다. 집 앞 큰길만 건너면 바로 이어지는 대장동 들길은 파란색과 해바라기를 그리게 만든 발상지이기도 하고 내 작품의 모태가 되어 왔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들길에 시멘트가 메워지고 큰 길이 나고 키 큰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저녁노을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더 이상 개구리울음도 들을 수 없게 됐습니다.

대장동 신도시까지 조성되면 먼 길을 나가야 사색을 할 수 있는데 들길에서 받는 위로와 영감들이 현저히 줄어들겠지요. 과거와 현재의 원종동의 가장 큰 변화는 초록색이 현저히 줄고 회색이 야금야금 땅따먹기를 하는 것 아닐까요?

 

조춘제 作 「낯선 풍경」, 53×53cm, 장지에 분채·석채·방해말, 2022
조춘제 作 「낯선 풍경」, 53×53cm, 장지에 분채·석채·방해말, 2022

 

그림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어 평생의 업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또 그동안 화가의 길을 걸어오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오셨는지요?

중학교 1학년 첫 미술 수업 시간에 미술 선생님의 권유로 미술반 활동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선생님께서 데리고 가 주신 피카소 전()’을 보고 막연한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살아오는 과정에서 몇 번의 좌절과 진로 이탈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품은 뜻은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도는 것처럼 저도 그랬던 거 같습니다. 화가로서의 어려움은 모두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보상이 된다고 여겨집니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과 한 컷. 관람객 정다희 씨는 집 가까운 곳에서 이런 멋진 전시회를 보게 될 줄 몰랐다며 앞으로 자주 전시장을 찾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과 한 컷. 관람객 정다희 씨는 집 가까운 곳에서 이런 멋진 전시회를 보게 될 줄 몰랐다며 앞으로 자주 전시장을 찾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6개월 전에 봤던 해바라기와 최근 작품들 간에 미묘한 차이가 감지됩니다. 조춘제 작가의 해바라기는 어디서 시작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궁금합니다.

초기의 해바라기 작품들이 푸른 바탕에 노랑 꽃잎이 열중쉬어!’하는 자세였다면, 어느 순간 쉬어!‘로 바뀌었다가 다시 노랑 꽃잎을 떨구고 초록 꽃받침에 둘러싸인 꽃씨를 그리는 형태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꽃받침마저 무장해제하고 해바라기꽃 형체를 없애버린 후 화면 전체를 꽃씨로 채우는 과정까지 왔는데 이 전시가 끝나면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이 될 겁니다.

해바라기 꽃씨들이 어떻게 콜라보되고 어떤 이미지로 재탄생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저조차도 궁금하고 기대가 되고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렙니다.

 

조춘제 作 「낯선 풍경」, 61×91cm, 장지에분채·석채·방해말, 2022-27
조춘제 作 「낯선 풍경」, 61×91cm, 장지에분채·석채·방해말, 2022-27

 

정말 많은 해바라기를 그렸으면서도 또 여전히 새로운 해바라기를 그리는 모습에서 구도자의 치열함 같은 게 느껴집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림 작업에 임하는지 궁금합니다.

해바라기꽃이 재복(財福)을 불러들인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선호하고 그 수요에 부응하여 많은 작가가 해바라기꽃을 그리고 있는데, 저는 제 작품이 그런 이유의 수요에 동원되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해바라기꽃이어서가 아니라 작품이 좋아서 소장하는 그림이어야 했고, 똑같은 그림은 식상해서 저만의 해바라기, 춘제 씨의 해바라기가 필요했습니다. 춘제 씨의 해바라기가 춘제 씨만의 표현으로 해바라기가 상징하는 좋은 의미를 담아 춘제 씨를 닮은 그림을 그리는 게 앞으로의 목표입니다.

 

조춘제 作 「아침이 오는 시간」, 130.3×162cm, 장지에 분채, 2018
조춘제 作 「아침이 오는 시간」, 130.3×162cm, 장지에 분채, 2018

 

이번 올해의 작가상 수상 소식에 누구보다 가족들이 기뻐했을 것 같습니다. 가족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번 올해의 작가상은 개인의 영예이기 이전에 가족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 같습니다. 생각하면 미안한 일투성이지만, 엄마가 하고 싶은 거 자기들 때문에 못 했다는 핑계를 대지 말라는 일침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습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헤쳐모여를 실천하면서 살아 낸 결과물이기에 더 소중하고 빛나는 상입니다.

 

조춘제 作 「꽃이 나에게 말을걸다」, 160×116cm, 장지에 분채, 2021
조춘제 作 「꽃이 나에게 말을걸다」, 160×116cm, 장지에 분채, 2021

 

끝으로 이번 전시회를 마친 소감과 앞으로의 포부, 계획을 말씀해 주세요.

이제부터 시작이란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출발점에 서서 계획하고 있는 것들을 치밀하게 작업해 나갈 생각입니다. 올해의 작가상에 누가 되지 않게 작가로서의 삶을 잘 살아 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이종헌(콩나물신문 편집위원장)

온유 이주희 글씨/그림
온유 이주희 글씨/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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