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헌의 ‘아름다운 베르네川’

바람이 길을 낸다. 바투 다가온 늦가을이 바람에 날린다. 아파트 베란다 창으로 보이는 은행나무 우듬지에 세상을 깨우는 햇귀가 찾아들었다. 아침 햇살이 밝게 비치자 투명한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우뚝 솟은 나무마다 노랗게 물든 부채꼴 잎들을 심술궂은 바람이 흔든다. 가만한 바람에도 흥을 주체하지 못한 무희처럼 춤을 춘다. 가을을 샛노랗게 태우고 속절없이 흩날리는 모습은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한다.

높아진 하늘을 보면 완연한 가을이 왔다가 떠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은행나무 단풍은 이파리의 끝부분에서 잎자루로 물들어 가다가 떨켜까지 단풍 들면 떨어진다. 떨켜는 나무가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잎만 고스란히 떨어지게 하는 세포층이다.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영양분이나 물을 공급하지 않고 닫아버린 채 겨울 맞을 채비를 한다. 몸속의 수분도 뿌리로 내려보내 얼어 죽지 않도록 보호한다. 추운 지방에 자라는 나무의 나이테가 성글지 않고 촘촘한 이유는 성장이 더디기 때문이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은행잎이 눈길을 잡아챈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은행잎이 눈길을 잡아챈다.

 

여름 뙤약볕 아래 초록으로 장식했던 산도 울긋불긋 가을옷을 차려입었다. 바람이 기운을 차리자 은행잎이 비 내리듯 떨어졌다. 일 년에 딱 한 번 대지에 황금색 잎을 뿌리고 노란 이불을 환하게 깔아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다. 나무는 무성했던 이파리를 모두 떨어내지만, 조금의 품위도 잃지 않는다. 천 년 고목 은행나무는 가을의 전설이다. 오랜 세월, 거친 풍상을 이겨낸 노거수의 의연함이 존경스럽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가 만들어낸 넉넉한 풍채와 변화무쌍한 위용이 범상치 않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켜온 정신적 가치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은행잎 잔뜩 달린 나무 아래를 지나면 마음조차 가을을 닮아간다. 높고 파란 하늘 아래 노란 은행잎이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바람 불 때마다 눈처럼 흩날리는 잎이 영화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풍경이 달라져 걸음이 느려지고 휴대전화를 꺼내 셔터 누르는 손이 바쁘다. 나무 아래 놓인 기다란 벤치와 버려둔 낡은 자전거, 담장과 장독대, 녹슬고 낡은 창고까지 추억의 한 장면이다. 노란 은행잎 카펫을 밟고 지나는 무심한 모습도 특별히 아름다운 풍경이다. 은행나무 아래에 서면 물감을 쏟아부은 듯 세상이 온통 노랗게 변한 느낌이다. 황금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키스> 속 연인이 잠들어 있을 것만 같다.

 

인고의 세월을 보낸 노거수를 보면 경이롭고 존경스럽다.
인고의 세월을 보낸 노거수를 보면 경이롭고 존경스럽다.

 

은행나무는 특성상 자연 번식이 어렵다고 한다. 식물이 종자를 과육으로 둘러싸는 이유는 단 하나다. 동물이 열매를 먹고 멀리 퍼뜨리게 하려는 것이다. 은행 열매의 악취가 짙어지는 이유는 철저히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다른 동물이 열매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온전히 자기 후손으로 번식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한다. 삵과 오소리와 너구리가 먹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추리소설에 나오는 청산가리 계열의 아미그달린(amygdalin)이라는 독소가 들어 있어 동물에 의해 번식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인간이 은행나무의 유일한 종자 전파자.

쾌청한 공기가 폐부를 깊숙이 채우는데 익숙한 악취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파란 하늘에 황금빛 잎을 흩날리며 낭만을 떠올리게 하는 은행나무지만, 열매의 악취는 아주 고약하다. 형언하기 어려운 역겨운 냄새다. 나무가 아니라 암나무에 열린 열매에서 나는 냄새다. 과육질에 빌로볼(Bilobol)’은행산(Ginkgo acid)’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2010년부터 DNA를 검사해 수나무만 가로수로 심는다고 한다.

땅에 떨어진 은행 열매를 잘못 밟아 악취 때문에 오해받은 이야기는 웃음을 자아낸다. 원인을 찾으려 큼큼거리며 서로를 쳐다보고 신발을 들어 냄새를 맡고 얼굴을 붉혔다는 일화는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행정기관에 악취를 막아달라는 민원이 많이 접수된다고 한다. 몇몇 자치단체에서는 열매가 열리는 암나무 아래에 우산이나 깔때기 형태의 은행 열매를 수거하는 그물을 설치했다고 한다. 열매가 그물망 안으로 모이도록 하는 아이디어 장치다. 포클레인 등 진동 장치로 나무를 충격하여 열매를 떨어뜨리는 것을 뉴스에서 본다. 인간의 이기심에서 나온 소란이 안타깝다.

 

바닥에 떨어진 은행잎도 풍경이 된다.
바닥에 떨어진 은행잎도 풍경이 된다.

 

인권과 동물 권리도 중요하지만, 흔히 보는 나무의 권리도 중요하다. 우리는 가끔 나무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잊고 푸대접한다. 나무의 수고를 안다면 가을철에 잠깐 풍기는 악취 정도는 참을 만하지 않겠는가. 가로수를 자세히 보면 검은색의 매캐한 오염물질이 가득 붙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콘크리트 회색 도시의 차량 분진과 미세먼지를 마시면서도 녹색 잎을 내민다. 미세먼지는 잎사귀의 기공으로 들어와서 박히고, 가지와 줄기에 달라붙는다. 나무는 인간이 만들어 낸 이산화탄소와 대기오염물질을 흡착하고 미세먼지도 잡아주며 산소를 만든다. 은행나무는 여름철에는 무더운 공기를 순환시켜 열대야도 줄여준다. 또한 나무껍질이 불에 잘 타지 않아서 화재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이런 이유로 가로수로 은행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생명력이 강하다. ‘살아있는 화석이라고도 부른다. 공룡이 살았던 고생대부터 지금까지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은행나무가 자연적으로 분포하는 서식지는 중국 일부분이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한국, 일본에도 많이 심겨 있다. 유럽에서는 은행나무를 보기 어렵다고 한다. 서식지가 적고 사람에 의해 심어지다 보니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에서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했다.

 

아름다운 은행나무길 (사진출처 아산시청)
아름다운 은행나무길 (사진출처 아산시청)

 

가로수 은행나무가 많다. 알베르 카뮈는 모든 잎이 꽃이 피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라고 했다. 시내 곳곳의 도로에 즐비하게 가로수로 심겨 있다.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소사역까지 가는 도로에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그림처럼 아름답다. 봄에 벚꽃이 터널을 이룬다면 가을에는 황금색으로 물든 은행잎이 터널을 이룬다. 근린공원이나 주택가에도 아름답게 물든 은행잎을 보면 마음도 곱게 물든다.

은행나무에 단풍이 들어 절정을 맞은 황금물결이 춤추고 있다. 수채화 같은 은행나무 길을 걸으며 가을과 헤어지기 전에 추억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가슴 아픈 사건이 많은 이 가을에 은행나무처럼 넉넉한 사람의 품은 커다란 위안을 준다.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나간 예쁜 꽃의 넋들을 위로한다. 은행잎처럼 경건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도 깊어지길 기도한다. 아날로그 감성을 떠올리며 예쁜 은행잎 하나를 소중히 주웠다. 책갈피에 이울어가는 2022년의 가을을 꽂아둘 참이다.

 

| 김태헌(수필가, 한국공무원문인협회 사무국장)

김태헌 수필가
김태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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