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명화로 보는 색채심리’ 23

이태원 참사의 슬픔이 가슴을 짓누른다. 좁은 골목에서 죽어간 156명의 싸늘한 죽음을 생각하니 눈물이 차오른다.

1852년 런던에서 태어난 조지 클로젠(George Clausen, 18521944)은 장식 예술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우스 켄싱턴 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다. 프랑스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일하면서 바르비종파의 밀레와 인상파의 모네에게 깊이 심취하였다. 파리 근교의 바르비종 마을에 모여서 농촌의 삶과 풍경을 화폭에 담은 바르비종파와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인상파의 영향으로 빛이 풍경의 주제라고 생각하였다. 1909년부터 4년 동안 영국의 로열 아카데미의 회화 교수로 재직했다.

 

조지 클로젠, 「길, 겨울 아침」, 1923년, 50.8x61, 캔버스에 유채, 런던 테이트 갤러리
조지 클로젠, 「길, 겨울 아침」, 1923년, 50.8x61, 캔버스에 유채, 런던 테이트 갤러리

 

1차 세계 대전으로 무수한 젊은 병사가 스러졌다. 65세였던 그는 딸이 전쟁의 포화 속에 약혼자를 잃고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1916년 전쟁으로 희생된 젊은이를 애도하기 위하여 작품 울고 있는 젊은이, Youth Mourning을 그렸다. 작품에서 답답하고 비통한 마음을 흑갈색인 세피아(sepia)로 표현했다.

화가는 91.4cm의 정사각형 캔버스에 세피아를 배경색으로 칠했다. 컴컴하고 황량한 느낌이 나는 진한 갈색만으로도 전쟁터의 참혹함이 전해진다. 그림 속에 벌거벗은 젊은 여인이 나무 십자가를 꽂은 무덤 앞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엎드려 있다. 차가운 흙바닥에서 얼굴을 감싼 채 숨죽여가며 울고 있다. 깊은 상실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조지 클로젠, '울고 있는 젊은이', 1916년, 91.4x91.4, 캔버스에 유채,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조지 클로젠, '울고 있는 젊은이', 1916년, 91.4x91.4, 캔버스에 유채,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필자는 모 지방 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치매 통합센터에서 명화로 마음을 치유하는 집단 미술 심리치료를 진행했었다. 치매 전 단계의 어르신들은 큰 스크린으로 작품 울고 있는 젊은이를 감상하였다. 장내가 숙연해졌다. 대상자들은 자신의 우여곡절 많은 아픔을 그림 속의 여인에게 그대로 투사하였다. 젊은 여자가 슬퍼하는 이유와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가엾은 여인에게 따뜻한 담요를 덮어주고, 밥 한 끼라도 차려서 위로해 주고 싶다고 하였다. 할머니 한 분이 울먹거리며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었다. 알코올 중독인 남편의 폭력과 의처증을 견디다 못해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도망쳤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식당에서 일하던 중에 월셋집에 불이 나서 두 자녀를 모두 잃었다고 했다. 자신의 박복한 삶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실컷 울고 난 할머니는 그동안 묵혀두었던 답답한 마음이 한결 시원해졌다고 말하였다.

색채 심리치료에서 자신의 감정과 건강 상태에 따라 선택한 색깔은 인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우리의 몸과 정신과 감정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게 하여 마음에 안정을 준다. 세피아 컬러를 배경으로 그린 명화가 영혼을 갉아먹는 슬픈 독소를 빼내는 역할을 한다. 때론 눈물이 약이다. 감정을 분출해서 마음의 균형을 잡아주고 현실을 스스로 헤처 나가도록 돕는다.

 

조지 클로젠(George Clausen, 1852–1944), 「자화상」, 1882년, 로열 아트 아카데미
조지 클로젠(George Clausen, 1852–1944), 「자화상」, 1882년, 로열 아트 아카데미

 

고대 로마에서 갈색 옷은 하층 계급이나 야만인을 뜻했다. 가난한 사람을 풀라티(pullati)’라고 불렀는데 갈색 옷을 입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상류층은 값비싼 염색 직물을 사용했지만, 하류층은 동물의 털 찌꺼기로 만든 옷이나 탈색하지 않은 갈색의 직물을 입었다. 당시 갈색은 검은색보다 값이 저렴했다. 빈민은 평상복은 물론 장례식에서도 갈색 옷을 입었다. 로마를 다룬 영화인 벤허스타르타쿠스에서 하류민의 옷차림을 보아도 갈색인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오징어의 먹물에서 추출한 갈색인 세피아 잉크를 처음 사용했다. 세피아는 오징어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인 스피아(spia)’에서 유래했다. 세피아는 오징어 먹물이 쉽게 부패하는 것을 빗대어 탈세 같은 세금 비리를 은유적으로 뜻하기도 했다. 19세기에는 이런 단점을 보완하여 알칼리에 먹물을 녹여서 염산으로 침전시키고 건조하여 물감을 만들었다.

 

고디바 로고
고디바 로고

 

명품은 상품만 파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도 판다. 고디바(Godiva)100여 년 전통의 벨기에 프리미엄 초콜릿 브랜드다. 1926년 고디바를 창립한 조셉 드랍스는 세피아 톤의 진한 갈색 로고에 나체의 여인이 말을 타고 있는 형상을 담았다. 여기에 흥미로운 탄생 비화가 숨겨져 있다.

레이디 고다이버(Lady Godiva)’11세기 영국 코번트리 지방의 영주인 레오프릭 백작의 아내였다. 당시 바이킹이 영국을 지배하여 농민에게 가혹한 세금을 물렸다. 농민은 세금을 내기 위해 땅과 가축을 영주에게 바쳤고, 소작농이나 노예로 전락하였다. 비참한 그들을 돌보던 고다이버는 세금을 줄여 달라고 백작에게 끈질기게 간청하였다. 백작은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 한 바퀴를 돌면, 고려해보겠다.”라고 하였다. 당시 16세였던 고다이버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머리카락으로만 몸을 가리고 말에 올라 마을을 돌았다. 예상치 못한 아내의 행동에 놀란 백작은 세금을 감면해주었다. 아내의 뜻을 따라서 가톨릭 신앙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존 콜리어, 「레이디 고다이바」, 1898년, 허버트 아트 갤러리와 박물관
존 콜리어, 「레이디 고다이바」, 1898년, 허버트 아트 갤러리와 박물관

 

영어에 관음증을 뜻하는 피핑 톰(Peeping Tom)’이란 단어가 있다. 고다이버에게 감동한 농민은 그녀가 영지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커튼을 가리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단 한 사람, 재단사 톰은 창문 틈으로 고다이버를 엿보다가 눈이 멀었다고 한다. 영국은 희생과 용기의 아이콘인 그녀를 기리기 위해 1997년부터 매년 가을에 사흘 동안 고디바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세피아 톤이 주는 효과는 컬러사진을 빛바랜 진한 갈색으로 바꾸어 준다. 디지털카메라의 사진 편집 프로그램 컬러 모드에 기본으로 들어있다. 포토샵으로도 손쉽게 세피아 톤을 만들 수 있다. 사진이나 영상매체에서 과거를 회상하거나 오래된 추억의 분위기를 표현할 때 효과적이다

세피아는 존경받는 사람이 풍기는 안정감과 신뢰감, 지혜와 성실을 나타낸다.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객관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원활하게 일을 진행하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색상이다. 이 색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융통성이 없어 보인다. 새로운 아이디어보다는 과거에 집착하며 너무 진중해서 무거운 느낌을 초래한다. 자연에서 말라죽은 사물에 많은 세피아 색상은 슬픔과 고통, 가난과 인색함, 부패와 재난을 상징하기도 한다.

슬픔의 감정은 지혜롭게 드러내야 한다. 참기만 하면 속이 곪는다.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돕는 처방이 필요하다. 친구나 지인, 영화나 음악, 산책이나 여행 등 나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 명화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 의식의 깊숙한 부분을 자극하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슬픔을 풀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마음이 무거운 이 가을, 참사로 희생된 젊은 영혼의 안식을 빈다. 슬픈 감정을 분출하는 나만의 방법을 찾아서 절망에도 살아갈 소망을 붙잡기를 바란다.

 

| 김애란(화가, 미술 심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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