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성 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하마르티아(Hamartia)’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로 ‘판단의 잘못이나 착오 또는 비극적 결함’을 뜻한다. 이는 주로 희곡의 하나의 유형인 비극에서 많이 나오는 것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재능과 인성을 가진 주인공이 그의 악의 때문이 아닌 순간적이거나 일시적인 잘못으로 인해 소중한 많은 것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의 비극적 파국을 맞이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강조한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주인공의 남다른 능력에 비교해 그가 행한 결함의 크기는 극히 사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그의 모든 노력과 시간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게 되고 결국 종말에 이르러서는 커다란 비극, 즉 죽음으로 끝을 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햄릿을 보면, 햄릿은 아버지인 국왕을 잃었고 두 달도 되지 않아 어머니가 자신의 숙부와 결혼하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세상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비롯한 어떤 여인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참아내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고통의 물결을 두 손으로 막아 이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한가? 죽음은 잠드는 것, 그뿐이다. 잠들면 모든 것이 끝난다. 마음의 번뇌도 육체가 받는 온갖 고통도, 그렇다면 죽고 잠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열렬히 찾아야 할 삶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잠들면 꿈도 꾸겠지. 아, 여기서 걸리는구나. 이 세상의 온갖 번뇌를 벗어던지고 영원히 죽음의 잠을 잘 때 어떤 꿈을 꾸게 될 것인지, 이를 생각하면 망설여지는구나. 이 망설임이 비참한 인생을 그토록 오래 끌게 하는 것이다.”

햄릿에게는 삶이 허망했다. 더 이상 살아가고픈 의욕이나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직 그를 슬프게 하는 것을 없애는 것 외에는.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삶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갔다. 햄릿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인 오필리아의 아버지를 실수로 죽이게 된다.

오필리아는 애인이었던 햄릿의 실수로 자신의 아버지가 죽자 비탄에 빠지게 되고 이로 인해 오필리아마저 정신적으로 미쳐 햄릿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 사랑하는 여인마저 잃은 햄릿의 복수가 두려웠던 햄릿의 숙부이자 왕은 햄릿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

아버지를 잃은 오필리아의 오빠를 이용해 햄릿과 결투를 벌이게 하고 이 결투 과정에서 오필리아의 오빠와 햄릿의 어머니마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왕은 햄릿에 의해 결국 죽게 되고 만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긴 했지만, 햄릿도 그 많은 짐을 짊어진 채 목숨을 잃는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삶이 파멸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유령을 보게 된 햄릿 (사진 출처 위키백과)
아버지의 유령을 보게 된 햄릿 (사진 출처 위키백과)

 

오델로의 경우도 비슷하다. 오델로와 데스데모나는 완벽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너무나 아끼기에 사회의 관습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었다. 오델로는 무어인(북서 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이었지만, 그것을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열등감도 없었다. 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그 여정에서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오델로에게 있어 약점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은 약점이 되어 버리고 만다. 자신은 그러한 열등감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무의식중에 자신도 모르는 내면의 깊은 곳에 그러한 것이 숨어 있었다. 평상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조그만 사건으로 인해 숨어 있었던 삶의 올가미에 걸리고 만다.

“데스데모나가 도저히 길들일 수 없는 매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면, 만일 마음속에 꼭 잡아매 놓고 싶더라도 나는 휘파람을 불며 깨끗이 놓아줘야지. 돌아오지 않도록 바람 부는 쪽으로 날려 보내고 제멋대로 먹이를 찾게 해야지. 혹시 내가 피부색이 검고 한량들같이 고상한 사교술이 없다고 해서, 또는 내 나이가 이미 한창때를 지났다고 해서, 그녀가 날 버릴는지도 모르지. 결국 모욕을 당한다면, 나를 구하는 길은 그녀를 미워하는 거야. 아, 결혼이란 원망스럽구나. 상냥한 여자를 입으로는 제 것이라고 하면서 그 여자의 욕망은 갖지 못하거든! 사랑하는 사람을 남의 자유에 맡겨 놓고, 자기는 한 모퉁이나 차지할 바에야 차라리 두꺼비가 돼서 땅속 구멍에서 습기나 마시고 사는 것이 낫지.”

예상치 못한 일로 의한 데스데모나에 대한 오델로의 의심은 두 사람의 삶을 삼켜버릴 수 있을 만큼 증폭되었다. 그로 인해 오델로와 데스데모나의 온전했던 사랑은 결국 파멸로 이르게 되고 만다.

오이디프스 또한 이러한 것의 대표적 예라 할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라이오스는 테바이의 왕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펠롭스의 아들 크리스포스가 미소년이었기에 그를 사랑하여 겁탈하였다. 이에 크리스포스는 마음의 깊은 상처를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아들을 잃은 펠롭스는 라이오스에게 나중에 라이오스가 왕이 되더라도 아들을 얻지 못할 것이며, 만약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리라는 저주를 퍼붓는다.

나중에 테바이의 왕이 된 라이오스는 아름다운 여인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 하지만 결혼 후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자식이 태어나지 못했다. 라이오스는 당시 신탁을 담당한 곳에 찾아가 원인을 물어본 결과 그가 나중에 아들을 얻게 되기는 하는데 그 아들이 장차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이고 그 아들이 자신의 어머니이자 라이오스 아내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해 준다.

그리고 얼마 뒤 이오카스테가 아이를 임신하였고 아들을 출산한다. 이에 라이오스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그 신탁의 예언이 실현될 것이 두려워 이를 미리 막기 위해 아들의 발목을 뚫어 가죽끈으로 묶은 후 자신의 부하를 시켜 사람이 없는 산골짜기에 갖다 버리게 시킨다. 버려진 아이는 곧 죽을 운명이었으나, 주위의 양치는 목동에 의해 발견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그 목동은 주위에 자식이 없는 부부에게 아이를 맡기게 되고 그 부부는 그 아이를 자신들의 자식인 것처럼 성실히 맡아 기른다. 그 아이는 잘 성장하였는데, 어느 날 청년이 되었을 때 주위 사람과 말다툼 끝에 자신은 버려진 아이였고 현재의 부모가 주워다 길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충격을 받아 집을 떠나 길을 가던 중 마차를 타고 가던 한 일행과 마주치는 데 마차를 타고 가던 이가 길을 비키라는 말에 절망한 마음이 화로 돌변하면서 그 마차 타고 가던 이와 시비하던 중 그를 살해하게 된다. 그 마차를 타고 가던 이는 다름 아닌 라이오스였다.

당시 라이오스가 다스리던 나라에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을 무참히 괴롭혔는데 라이오스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라이오스의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친오빠가 섭정을 하게 되었고, 그는 그 스핑크스를 없애는 사람에게 왕위와 이오카스테를 왕비로 주겠다고 공언을 한다. 이에 라이오스의 아들은 그가 죽인 사람이 아버지인 것도 몰랐고, 왕비였던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사실도 모른 채 스핑크스와 대결을 벌여 이기게 된다. 이에 라이오스를 죽인 그 청년은 테바이의 왕이 되었고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해 왕비로 맞이하게 된다. 운명이었는지는 모르나 신탁의 예언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오이디푸스다. 왕위에 오른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와 사이에 딸 두 명과 아들 두 명을 낳는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충격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오이디푸스 또한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마음의 커다란 상처를 얻고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찔러 장님이 된다. 그리고 그와 자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안티코네와 함께 평생 방랑의 길을 나선다. 다른 딸 한 명과 아들 두 명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아버지인 오이디푸스를 떠난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굳이 뛰어난 능력의 사람뿐만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이러한 일은 일어날 수 있다. 일상에서 사소한 실수나 순간적인 판단의 잘못이 그동안 우리가 최선을 다해 이루어 놓았던 것을 하루아침에 붕괴시켜 버리기도 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더 복잡하게 얽히게 될 뿐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항상 옳다고 믿는다면 이로 인해 가지 말아야 할 길로 계속해서 가게 될 수도 있다. 나를 돌아보거나 내 주위를 살펴볼 여지도 없이 오로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이루고자 무한 질주를 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끊임없는 사고가 일어나게 되고 이로 인한 아픔도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이 판단하는 것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가장 치명적인 오판이다.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신만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된다. 나 자신의 판단이 잘못일 수도 있고, 나의 생각이 착오일 가능성도 있으며, 나 자신에게 있어 내가 모르는 결함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겸손이 더 큰 비극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사소한 것이 우리의 인생을 망치게 된다면 그것만한 비극은 없을 것이다.

 

| 정태성(한신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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