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헌의 ‘아름다운 베르네川’

가을은 짧지만 찬란했다. 바람이 기척을 하더니 나뭇잎이 오소소 떨어져 나뒹군다. 곤충들은 고치를 틀거나 두꺼운 나무껍질을 파고들어 번데기로 이미 겨울잠에 들었다. 나무마다 제각각 개성이 묻어나는 색깔로 옷을 갈아입고 표정을 달리한다. 베르네천에 둘러선 옹벽을 어깨동무하고 기어오르던 담쟁이가 찬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결 따라 몸을 누인다. 가을 햇살이 여리게 내리더니 푸른 담쟁이 잎에도 알록달록 색이 찾아들었다. 시나브로 고운 색동옷으로 슬쩍 바꿔 입더니 황홀한 색깔로 물들었다. 수줍게 붉어진 표정조차 눈길 잡아채고 어여쁜 운치를 아낌없이 전한다.

베르네천을 산책할 때마다 회색 캔버스를 가득 채워가는 담쟁이가 즐거움을 주었다. 무더운 여름, 푸른 커튼을 친 듯 뙤약볕을 막아주고 숨 막히게 더운 바람을 식혀주는 담쟁이는 메마른 도시에서도 자연의 소중함을 속삭였다. 하루가 다르게 벽화를 그려가며 숨 가쁜 희망을 노래했다. 거친 벽에 줄기를 뻗어 올리며 사방에 잔가지를 들러 치고 한 땀 한 땀 뻗어가는 담쟁이를 보면, 누군가가 캔버스에 그린 그림을 보는 듯 착각에 빠진다. 작은 틈바구니에서 굵고 강하게 자라나 푸른 싹을 틔우는 담쟁이의 강인한 생명력과 힘을 보면서 세상살이의 위안과 의지를 얻는다.

 

어깨동무하고 함께 벽을 오른 담쟁이의 아름다운 모습
어깨동무하고 함께 벽을 오른 담쟁이의 아름다운 모습

 

오래된 교회나 건물 벽을 장식하던 아름다운 모습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몸부림치며 붉은 벽돌을 기어오르던 담쟁이 모습은 누구나 하나쯤 간직하고 있을법한, 아련하고 그리운 추억을 불러온다. 담쟁이를 볼 때면, 자기 삶을 위해 대처로 떠났던 그리운 얼굴들이 추억 속에 포개진다. 박태준 선생이 작곡하고 이은상 선생이 노랫말을 쓴 가곡 동무 생각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라고 시작한다. 노랫말의 청라언덕은 대구광역시 동산동에 있다. 개화기 때 외국 선교사들의 언덕 위에 지은 집에 살았는데, 주택의 벽면에 담쟁이덩굴이 가득 뒤덮여있어 붙인 이름이다. 푸른 담쟁이덩굴(청라, 靑蘿)이 있는 언덕을 일컫는데, ‘대구의 몽마르트르 언덕이라고도 부르는 유서 깊은 현장이다.

개화기 때 세운 학교나 서구식 건물과 붉은 벽돌 굴뚝에 담쟁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담쟁이의 굽히지 않고 끈질긴 속성과 무성한 잎으로 감싼 모습이 건물을 아름답게 꾸며 길렀다. 행정기관에서 의미 있고 오랜 건물을 사적史蹟으로 지정하였다. 관리하는 주체에게 지독한 생명력으로 문화재를 훼손하는 흉물이라며 제거하라는 공문을 보내지만 상징과도 같아 제거하기 어렵다고 맞서 뉴스에 등장했다. 공문에 적힌 담쟁이의 위험성 근거는 무성하면 습기가 높아지고 이끼가 자란다. 돌의 부식이 빨라진다. 이 과정에서 석조 문화재에 해로운 화학물질도 발생한다. 돌의 부식을 촉진한다. 습기와 먼지 등이 10년 이상 엉키게 되면 담쟁이를 떼어내도 석재에 검은 물이 든다.”라고 했다. 부식과 변색이 되니 담쟁이를 제거하라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를 두고 담쟁이는 전통적으로 모든 걸 파괴하는 해로운 식물이었는데, 미국 아이비리그 때문에 좋은 걸로 둔갑했다.”고 개탄했다.

 

베르네천  천변 옹벽을 악착같이 기오 오른 담쟁이덩굴의 모습
베르네천 천변 옹벽을 악착같이 기오 오른 담쟁이덩굴의 모습

 

담쟁이의 영어 명칭은 ‘Ivy’. 아이비리그(Ivy League)1936, <뉴욕 헤럴드트리뷴> 지 기자인 스탠리 우드워드가 미국 동부의 8개 대학 건물이 담쟁이덩굴(Ivy)로 뒤덮일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것에 착안하여 신문 기사에 ‘Ivy League’라는 단어를 게재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1636년에 설립한 하버드대학교는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에 정착한 후 설립한 첫 번째 대학으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 명문이다. 미국독립전쟁 이전에 세웠는데, 맨 나중인 1853년에 코넬대학교가 지어졌다.

1954, 미국의 대학 체육협회인 ‘NCAA(National 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 연맹설립 이후, ‘아이비리그라는 용어가 공식화되었다. 미국 북동부에 있는 하버드대학교·예일대학교·펜실베이니아대학교·프린스턴대학교·컬럼비아대학교·브라운대학교·다트머스대학교·코넬대학교 등 8개 명문 사립대학들이 결성한 미식축구 등 대학 간 운동경기 연맹으로, 8개 대학 전체를 통칭하는 의미로 불린다.

우리나라의 여러 지자체에서 도심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를 줄이려 옹벽에 담쟁이를 심는다. 무시무시한 생명력으로 단열효과가 뛰어나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효과는 물론,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도시구조물 벽면 입체녹화사업'을 추진하기도 한다. 단색 평면의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덩굴의 가지는 벽화처럼 보인다. 나무를 휘감은 담쟁이덩굴에서 삭막한 도시 속 특별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은데미공원의 상수리나무를 타고 오른 담쟁이가 곱게 물들었다
은데미공원의 상수리나무를 타고 오른 담쟁이가 곱게 물들었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를 떠올렸다. 마른 담장을 감싸고 소박한 벽화로 이야기를 건네는 담쟁이덩굴은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위로를 나눠준다. 담쟁이의 꽃말은 우정이라고 한다. 한 뼘을 기어올라도 반드시 손잡고 함께 기어오른다. 무성한 계절을 보내고 겨울 앞에 잎을 모두 떨군 채 남은 덩굴로 당당하게 발가벗은 모습을 드러내는 경건은 감동이다. 담쟁이덩굴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색채가 아닌 형태로 드러난다. 메마른 담장을 감싸 안는 담쟁이덩굴의 모습에서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어루만져주는 따스함을 발견하고 위로와 치유의 손길을 배운다.

우리의 아름다운 가을은 어디로 갔을까? 희망의 절벽 앞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많다. 여전히 불안한 코로나19의 두려움과 후유증, 대책 없는 고금리와 고물가, 환율의 변화에 따른 도미노 현상, 세계 각국의 군비경쟁과 위협, 핵무기와 이데올로기 망령이 도사린 질서의 불협화음과 신냉전 체제, 안타깝고 한심스러운 우리의 정치 상황과 이태원 참사의 아픔을 보며 시름이 늘었다. 혹독한 겨울, 차가운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를 생각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도종환 시인이 해직 교사 시절, 암울한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노래하며 쓴 담쟁이를 읊조린다.

 

담쟁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 아름다운 시가  쏟아질 것 같다
담쟁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 아름다운 시가 쏟아질 것 같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을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도종환의 시 담쟁이전문

 

| 김태헌(수필가, 한국공무원문인협회 사무국장)

 

김태헌 수필가
김태헌 수필가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