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명화로 보는 색채심리’ 24

각박했던 세월의 흔적이 퇴적암처럼 쌓인 작품이 있다. 화가 미석 박수근(美石 朴壽根, 1914~1965)은 물감을 여러 번 발라서 두껍게 만든 캔버스에 나목과 여인을 그렸다. 소설가 박완서는 그의 작품을 보며 김장철 소소리 바람에 떠는 나목이라고 표현하였다. 험난한 풍파를 견딘 퇴적암 같은 작품의 바탕색인 샌드 컬러에 관하여 알아본다.

1914년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에서 부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구공립보통학교(현재의 초등학교)를 다닐 때 프랑스 화가 밀레의 작품 만종의 복사판을 보고 감동하여 화가의 꿈을 키웠다. 일본인 담임선생님은 화구를 사주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보통학교만 졸업하였다.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193218세에 처음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였다. 1934년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자식들만 남겨두고 타지로 떠났다. 스무 살의 청년 박수근은 혹독한 가난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다.

 

화가 박수근(1914~1965) 사진출처(나무위키)
화가 박수근(1914~1965) 사진출처(나무위키)

 

그는 그때부터 1943년까지 해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다수 수상하였다. 정신적인 자양분을 얻기 위해 신문을 세심히 읽고 스크랩하였다. 밀레처럼 농촌의 풍경과 일하는 여인을 소재로 그렸다. 가난한 서민의 진실한 삶의 모습을 담기 위하여 수많은 습작을 하면서 사물의 단순한 형태를 연구했다. 마티에르(질감)에 관심을 가지고 캔버스에 샌드 컬러 유화물감을 바르고 말리는 작업을 오랜 시간 되풀이했다. 배경을 완성하고 진한 윤곽선으로 사물을 표현했다.

194026세가 되어 김복순과 결혼하였다. 평남 도청의 서기로 일하면서 휴일이면 평양의 화가와 어울리며 그림을 그렸다. 신혼의 좁은 단칸방에 군식구까지 합하여 일곱 식구가 살았다. 쥐꼬리만 한 봉급을 쪼개서 월세를 내고 나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모두 누우면 뒤척거리지도 못할 정도로 비좁은 방이었지만, 그는 아내를 모델로 몇 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두 아이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공산당 치하에서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목숨의 위협을 받자 가족을 남긴 채 남쪽으로 피신했다. 곧이어 아내가 두 자녀를 데리고 월남하여 서울에서 극적으로 상봉했다.

 

박수근 作 『나무와 두 여인』, 1962년, 캔버스에 유채, 130x89㎝, 리움미술관
박수근 作 『나무와 두 여인』, 1962년, 캔버스에 유채, 130x89㎝, 리움미술관

 

막막한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친구의 소개로 1953년 미8PX(지금의 신세계백화점 건물)에서 미군에게 초상화 그려주는 일자리를 얻었다. 주한 미국 외교관 부인인 마가렛 밀러 여사는 그의 작품을 사들여 소장하였고, 일본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캔버스와 물감을 사다주기도 했다. 그녀의 주선으로 반도호텔에 반도화랑을 만들어 작품을 상설 전시하였다. 1965년 밀러 여사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화가 박수근>이란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소설가를 꿈꾸며 PX에서 경리로 일하던 박완서(1931~2011)를 만났다. 둘은 같이 막걸리를 마시며 서로의 꿈을 응원했다. 그녀는 박수근에게 영감을 받은 1970년 소설 <나목>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당시, 초상화로 모은 35만 원으로 창신동에 판잣집 한 채를 마련했다. PX를 그만두고 그림에만 몰두했다. 좁은 마루에 캔버스와 화구를 놓고 그린 작품으로 1953년부터 3년간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연속으로 수상하였다. 1957100호 크기의 대작 세 여인을 국전에 출품했으나 낙선하자 크게 실망하여 건강을 잃을 정도로 폭음했다. 신장과 간이 나빠졌고 왼쪽 눈에 백내장을 앓으면서도 돈이 없어 수술을 미루다가, 악화된 후에야 수술했으나 결국, 시력을 잃었다. 짙은 안경을 끼고 혼신을 쏟아 할아버지와 손자를 그려 국전에 출품하였으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1965년 향년 51세로 안타깝게 눈을 감았다.

 

창신동 집에서 박수근과 가족들
창신동 집에서 박수근과 가족들

 

국민 화가로 추앙받는 박수근 작품은 유독 위작이 많다. 20075월 서울 옥션 경매에서 1954~56년 작품인 빨래터452,000만 원에 낙찰되었다. 이듬해 1월 창간한 권위 있는 미술 잡지인 아트레이드대한민국 최고가(最高價) 그림이 짝퉁?’이라는 기사를 냈다. 서울 옥션은 즉각 명예훼손으로 30억 원을 요구하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법은 빨래터를 진품으로 추정하며, 위작 의혹 제기는 정당한 언론 행위로 판결했다.

한국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최대 규모의 위작 논란도 있었다. 2017년 대법원 3부는 김모 씨가 소유한 박수근과 이중섭의 작품 2,834점을 위작으로 판결했다. 그림 전량 몰수와 소각 명령을 내리고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해외 연구소의 감정 결과 1984년 이후에 생산된 물감 성분이 검출되었기 때문이다.

 

박수근 作 『빨래터』, 1954년, 캔버스에 유채, 15x31㎝. 리움미술관
박수근 作 『빨래터』, 1954년, 캔버스에 유채, 15x31㎝. 리움미술관

 

2022년 초, 필자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린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회를 찾았다. 전시관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북적여서 인기를 실감했다. 짧은 학력, 가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참혹한 세월을 이겨내고 찬란한 꽃을 피운 174점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어떠한 역경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꿈을 지켜낸 화백의 놀라운 삶에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특히 처음 대중에게 공개한 작품 초가집을 보고 만감이 교차했다. 박수근의 재능을 사랑했던 일본인 담임선생님에게 선물했던 작품 중 하나였다.

 

박수근 作 『초가집』, 1953년, 캔버스에 유채, 80.3×100cm, 서울미술관
박수근 作 『초가집』, 1953년, 캔버스에 유채, 80.3×100cm, 서울미술관

 

필자는 어려운 환경에 놓인 다문화 가정 자녀의 미술치료를 맡고 있다. A의 부모는 이혼 후 각자 가정을 꾸렸다. 올해 초등학생이 된 A는 할머니하고 같이 살지만, 부모와 왕래가 거의 없다. 대인공포증이 있어서 선생님이 무엇을 물어봐도 대답하지 못했다. 보통 아이들은 갈색 계통을 싫어하는데 A는 샌드 컬러 옷을 좋아하고 그림에도 사용했다. 개인 치료를 하다가 B와 같이하는 집단 치료로 바꾸었다. 첫 시간에 B가 이름을 물었다. A는 입을 꾹 다물고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먼저 다가가 시시콜콜 이야기도 잘 나눈다. 이 시간을 일주일 내내 손꼽아 기다린다고 하였다. 지난 11A가 빼빼로 과자 한 개를 내밀었다. 마음이 뭉클했다. 필자에겐 최고의 선물이었다.

샌드 컬러는 화려하지 않지만, 중후한 멋을 낸다. 사막의 모래 색깔로 과거의 발자취를 돌아보게 하는 내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컬러다. 안정감을 주고 편안함과 그윽함까지 안겨준다. 따뜻하고 은은한 이 컬러는 고전적인 부드러움을 느끼게 한다. 고풍스러워서 고급 원단과 만나면 더욱 빛이 난다. 어떠한 컬러와 배치해도 조화롭지만, 단정하고 도시적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효과적이다. 스타일을 빛나게 하므로 하나쯤 옷장 속에 있어도 좋다.

샌드 컬러는 선물 같은 색이다. 햇빛과 비를 맞고 땅속에 묻혀 오랜 시간의 흔적을 머금은 색상이다. 집안 인테리어에 샌드 컬러를 추가하면 인간적인 따뜻함이 느껴지고 포근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편안한 샌드 컬러를 보면 박수근처럼 어떠한 역경도 이겨내며 꿈을 향하여 정진하는 용기를 선물로 얻지 않을까. 잎을 모두 떨구고 추운 시기를 맨몸으로 견뎌내는 나목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여러모로 어려운 시기지만 잘 이겨가면서 소중한 겨울을 보내면 좋겠다.

 

| 김애란(화가, 미술 심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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