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나야. 너는 세상에 둘도 없는 .

사십 대의 끝자락에서 새삼스럽게 너를 다시 본다. 어느덧 오십이라는 나이가 어색해서 내 옆에 붙이기엔 너무 무거운 느낌이야. 내가 너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태어나 보니 형제가 많았고 아들이 귀한 집이다. 줄줄이 딸들이 태어났고 시골이고 학교가 멀고 부모님은 늘 일이 많았지. 주목받지 못한 시작이 문제였을까? 나는 늘 주인공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어. 잔디처럼 채송화처럼 촘촘한 무리 속에서 튀지 않고 피고 지며 안정감을 느꼈는지도 몰라.

마흔이 넘어가면서 치자꽃이 그렇게 좋아지더라. 새하얀 꽃잎에서 청초함과 고귀함을 느꼈어. 향기가 코끝을 스치면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야. 확실히 주인공이라는 느낌이 들었어. 그래선지는 몰라도 세심하게 분위기를 파악하는 감각이 생긴 것 같아.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불편한 것은 그냥 이해해버려. 해결된 게 아니라 내 맘 편하자고 내 식으로 해석하는 거지. 내가 나를 보호하는 방법이기도 해. 스트레스는 잘 받지 않아. 잘 웃고 아프지도 않아.

어릴 때는 주목받지 못하는 내가 싫었어. 특별히 잘하는 게 없었던 것 같아. 공부는 재미가 없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놀기 바빴지. 모처럼 머리를 자르고 와도 봐주는 사람이 없었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어린이에게 주는 상>을 받아와도 시큰둥하고, 저녁에 집에 안 들어가도 아무도 모르더라고. 존재감이 없다는 게 슬펐어. 그런 내가 싫었나 봐. 나도 나를 사랑할 줄을 몰랐으니까.

추석 때 본가에서 졸업앨범을 뒤적이는데 눈물이 왈칵 솟더라. 초중고등학교 졸업사진이 멀쩡하지가 않아. 내 얼굴이 없어. 손가락으로 뭉개 버리고 가위로 잘라 버렸더라고. 왜 그랬을까? 언제 그랬을까. 사랑받지 못한 표정이었을까. 나를 미워했던 어느 시기였겠지만 기억이 안 나. 얼굴 없는 내가 가여웠어. 앨범을 구할 수 있다면 그때의 내 얼굴을 보고 싶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어.

 

그림 - 이경화

 

지나고 보니 사계절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 집 앞의 경호강이 고마웠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몽땅 담고 흘렀잖아. 병풍 같은 나무들, 사철 바람 부는 언덕, 풍요로운 들판과 여섯 빛깔의 형제들이 언제나 강가에 있었더라고. 멀고도 먼 초등학교를 오롯이 걸어 다니며 건강하게 자라서 기특해. 지금 생각하면 자연 속에 그냥 던져진 듯한 그 시절이 오늘의 나를 만든 보석 같은 시간이었어. 그런 날도 그립다.

어린 내가 자라 청년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성장하니 부모님이 떠나시네. 작년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고 느낀 바가 많아. 아버지는 홀어머니 밑에 독자로 태어나 할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집안의 장손으로 자랐어. 형제 많은 집의 장녀인 어머니를 만나 외롭지 말라고 우리 육 남매를 낳았대. 첫아들이고 다섯 딸이야. 아들이 하나만 더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아. 내가 아들이었으면 내 동생 둘은 아마 없었을지도 몰라. 아찔하기도 해. 동생들이 있어 나는 참 좋거든. 시골이라는 특성과 시대적인 분위기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유난히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는 정서가 아쉽기는 했어. 우리 시대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했는데 이제는 인구 절벽 시대를 산다잖아. 결혼은 선택이고 아이도 선택인 시대여서 격세지감을 느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살아 계셨을 때처럼 자연스러웠어. 문득 더 그리워. 죽음이 이렇게 가까운 줄을 처음으로 느꼈어. 그동안의 수많은 부고는 그저 멀리 있는 안타까움이었지. 어쩌면 타인들도 나의 죽음에 그러지 않을까 싶어. 섭섭해하지는 않을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와 자식들이 아버지의 마지막을 정성스럽게 보내드렸어. 그 과정이 슬프면서도 따뜻했어. 나의 영원한 날개 같은 아버지의 죽음은 충격이었지만 새로운 통로로 진입한 아버지를 축복하는 느낌이었어. 더 좋은 곳에 잘 계시는 것 같아.

어릴 때 우리 동네에서 자주 봤던 어르신들의 장례식이 나에게는 축제처럼 느껴졌어. 허리춤에 보따리를 차고 떡을 받으러 아이들과 몰려다닌 기억이 나.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기대서 남자애들만 대나무 깃을 들게 하고 돈을 받는 걸 보고 왜 나는 안 주나? 입을 삐죽이던 볼 빨간 내가 떠오른다. 귀여워.

우리 집에는 제사가 일 년에 열두 번이 넘었고, 바쁜 와중에 늘 제사상을 정성스레 차리는 엄마 곁에서 살뜰히 심부름했어. 12시까지 안 자려고 용을 쓰던 내 얼굴이 떠올라. 작은집 새말 할머니가 늘 칭찬했어. 쪼그만 게 기특하다고. 뭘 바라고 그랬을까. 제사 지내는 모습이 좋아서였을까. 제삿밥 먹을 양으로 그랬는지도 몰라. 칭찬 듣는 맛도 한몫한 듯해.

나는 세상의 모든 아이가 행복하길 바라. 주인공으로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어. 그것을 위해 애쓰는 너를 응원해. 지금도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고 싶다. 미래! 그 어디쯤에 있을 너일지는 몰라도 여전히 두 눈을 반짝이며 세상을 탐색하고 있겠지.

응원할게. 더 너답게 거침없이 아낌없이 맘껏 살아내기를 !

 

이경화 수필가
이경화 수필가

 

이경화 프로필

2022년 계간 에세이 문예겨울호 수필등단

부천여성문학회 회원

부천유네스코책쓰기교육연구회 일인일저 책쓰기지도자

경기꿈의학교 교사, 사진동화집 진짜야, 그림책 소피의 그림일기,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