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아루바투가 뭐예요? 정자에 둘러앉은 어르신들이 아루바투를 한다고 한다. 지방 토속어도 앞뒤 맥락을 들어보면 짐작은 가는데 아루바투는 어느 별의 말인지 이해 불가지만 어르신들의 손놀림이 능숙하다. 젊은 사람들이 아루바투를 모른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면서도 표정은 의기양양이다.

남편과 늦은 저녁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식탁을 두고도 거실 바닥에 양반다리로 앉아 먹는 밥이 편한 것이 몸은 습관의 기억을 잊지 못하나 보다. 작정한 것이 아닌데도 밥 한술을 뜨면 무의식적으로 눈은 TV로 간다. 언제 맞추어 놓은 건지 모를 채널에서 연예인들의 웃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진다. 비취색 제주 바다가 배경으로 흘렀다. 연예인들이 제주도 둘레 길을 여행하며 소소한 일상을 그리고 있다. 그곳의 풍습과 마을을 소개하기도 하고 추억에 젖어 걷다가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했다. 제주도가 고향인 그들의 추억이니 오죽이나 좋을까. 토종 콩으로 만들었다는 콩국수를 먹는 장면에서는 밥상에 앉아서도 입맛이 다셔졌다.

정자를 지나가는 그들도 한과를 집어 든 어르신들이 아루바투를 한다는 말에 호기심이 일어 걸음을 멈췄다. “뭘 하신다고요?” 어르신은 당연히 그 말을 알아들어야 한다는 듯 정색을 하신다. 남편과 나는 금세 그 말을 눈치채고 폭소를 터트렸다. 한과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뜻이다. 한 어르신의 혀 꼬는 영어 발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어르신들의 태연한 모습이 더 큰 웃음을 줬다. 그들도 한발 늦게 말뜻을 알아채고 웃었고 한술 더 떠서 아루바투에 버금갈 입담으로 어르신들의 웃음보를 자극했다. 평균연령이 90에 가깝다고 한다. 언제 은퇴하시냐는 물음에 80세에 은퇴했는데도, 지금도 일을 하신다고. 앞으로도 더 할 수 있다며 자랑이 대단하다. 다른 어르신도 맞장구를 치며 신이 나셨다.

 

폐지 줍는 노인(출처 서울의 소리)
폐지 줍는 노인(출처 서울의 소리)

 

아루바투를 하며 즐겁게 사는 시골 어르신들이 있지만, 반면 폐지를 줍는 도시 어르신들의 삶은 폐지만큼이나 구겨져 보인다. 은퇴를 꿈꾸기는커녕 삶의 질을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다. 폐지에 파묻히고 느린 횡보로 인해 교통사고의 위험마저 안고 있다. 동네 어디서든 폐지 리어카와 맞닥뜨리면 조심을 하게 된다.

그날따라 약간의 내리막길인데 앞차가 속도를 확 줄였다. 나도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조정했다. 앞차 앞으로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커다란 폐지 뭉치만 공중을 둥둥 떠가고 있다. 슬금슬금 거리던 앞차가 옆길로 비켜서더니 시동을 끈다. 일 차선이라 비켜 갈 수도 없어 브레이크를 밟고 기다렸다. 스포츠머리를 한 덩치 큰 젊은 남자가 운전석에서 툭 내린다. 무질서하고 정돈되지 않은 몸매가 한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지켜봤다.

남자가 앞으로 뛰어가더니 폐지 뭉치를 잡아당겼다. 둥둥 떠가던 커다란 폐지 뭉치들이 아래로 천천히 미끄러지듯 내려간다. 내리막길 아래까지 폐지 뭉치를 잡아주고서는 뛰어와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을.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나치면서 보니 키가 작은 할머니가 매달리듯 리어카를 끌고 간다. 선입견에 대한 미안함과 사회의 따뜻한 일면을 본 것 같아 고마웠다. 할머니도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길가에 널브러진 폐지를 보면 덩치 큰 남자와 할머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넝마 같은 폐지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게 해 주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도 있다지만. 폐지 줍는 일은 왜 삶이 버거운 어르신 전용물인 것처럼 보일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도리질을 해보건만 떨떠름하다. 무료한 시간 메꾸기라고 하기엔 가당치 않은 현실이지 않은가. 저분들은 언제쯤에나 정년이 될까?

80에 정년을 맞이하고도 아루바투를 한다며 자랑하던 제주도 어르신들처럼, 새해에는 폐지를 줍는 도시 어르신들도 즐겁게 아루바투하는 세상이 왔으면 한다.

 

권정임 프로필

▣ 경북 안동 출생

▣ 명지대 아동학과 졸업

▣ 프리랜서

▣ 부천문인협회 디지털 백일장 산문 부문 최우수상 수상

▣ 공저 너에게 나를 보낸다.

▣ 2022년 계간에세이문예겨울호 수필 등단

 

권정임 수필가
권정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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