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꽃
김양숙
사랑이라는 말 앞에 함부로 놓지 말아야 하는 꽃이 있다
그리움이란 말조차 가슴에 품으면 형벌이 되는
동트기 전 절문을 나서던 젊은 중의 뒷모습에서 배어나던 고통
이별의 질량보다 전하지 못한 말의 내부가 더 아파
안으로만 삼키던 눈물을 닮은 꽃
가슴에 새겨진 퍼런 이름 하나 녹여 제 몸 안으로 흘려보내며 견딘
결핍의 시간들은 결빙점에서 향기를 지니지 못한 채 꽃이 되고
세상을 돌다 번뇌로 낡아버린 제 몸을 주워들고 돌아오는 고향 길
늙은 중의 옷자락에 배여 있는 안개를 닮은 꽃
치사량의 고독으로 얽혀들던 영혼을 끌고
흙으로 돌아가는 다비식에서
읽지 못하고 가슴에 품었던
분홍 페이지를 풀어내는
연기 같은 꽃
오래전의 봄날은 느닷없는 뉴스 앞에서 넘어지고
전하지 못한 편지 수취인 란에 쓰다만 이름 대신
눈물로 지는 꽃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한 방울의 이슬이 꽃으로 피는
끝내 제 이름마저 지우고가는 꽃을 본다
마지막 제 주소마저 지우고 가는 꽃을 본다
김양숙 프로필
제주출생. 1990년 <문학과 의식> 시 부분 등단. 2009년 <서울 시인상> 수상. 2017년 <시와 산문> 작품상 수상. 부천문인협회 회원. 사단법인 <시와 산문 문학회> 회장. 시집 『지금 뼈를 세우는 중이다』, 『기둥서방 길들이기』, 『흉터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