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의 설립과 활동 29

현재 북도면(北島面)은 강화도와 영종도 사이에 있는 행정구역으로 장봉도, 모도, 시도, 신도의 4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전에는 부천군을 구성하는 15개면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인천시 옹진군에 속해 있습니다. 장봉도는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의 3대 어장으로 알려질 만큼 어족이 풍부하였다고 합니다. 물고기를 말리던 곳을 건어장(乾魚場)이라고 하는데 건어장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을 정도이니 옛 장봉도의 어획량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특산물로 김이 유명합니다.

북도면사무소는 시도에 위치하고 있어 행정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모도와 시도 그리고 신도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신도항을 통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2025년이 되면 연륙교로 신도와 영종도가 연결될 예정이라고 하니 곧 승용차를 통해 편하게 신도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북도면에는 어떠한 역사가 있을까요?

일제강점기 북도면장을 지낸 나동한, 이중화와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인사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나동한(羅東漢)

나동한은 1925년부터 32년까지 북도면장을 합니다. 면장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합니다.

경기도수산회 참여

경기도수산회는 1924년에 설립되었는데 사무실은 인천부에 위치하게 됩니다. 경기도수산회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기도 지역의 수산업은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무실이 인천에 위치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동한은 여기에 선거인단과 위원으로 참여합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관보를 통해 선거인단의 이름과 주소지까지 발표하게 됩니다. 선거인단은 총 13명으로 여기에서 3명의 평의원을 선출하였습니다. 여기 선거인단에 북도면장을 했던 조종악(1921~1926, 1931~1939)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조선총독부 관보 7131929521)

1932년에 또다시 선거를 하는데 여기에서는 선거인단이 총 15명으로 3년 전보다 2명이 증가하게 됩니다. (조선총독부 관보16101932523)

경기도수산회에서는 1930년 평산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임시총대회를 하게 되는데 여기에 나동한은 위원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의안으로는 후임 회장으로 하야죽지조씨를 추천한 후 평산 회장, 삼영 부회장, 미원 평의원에게 기념품 증정의 건을 가결하고 어시장 문제를 협의한 후 마무리하였습니다. (1930621일 중외일보)

 

지방청 공문 부천군 북도면 신도리 나동한
지방청 공문 부천군 북도면 신도리 나동한

 

북도어업조합 참여

북도어업조합은 193132일 부천군 북도면 장봉리에 설립되었습니다. 나동한은 조합장으로 일한 후 1937년 임기를 만료하여 퇴임합니다. 뒤를 이어 경기도 부천군 북도면 장봉리 85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는 이원선이 조합장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조선총독부관보 322519371014)

1938년 정수용 감사가 임기만료로 퇴임하자 경기도 부천군 북도면 장봉리 2262번지에 주소를 둔 최문식과 함께 감사로 취임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관보 352019381010)

북도어업조합은 인천부 염건어시장(鹽乾魚市場)에도 단체로 참여합니다. 인천부에서 193575일에 낙성식, 즉 염건어시장이 완성하고 공사를 끝나게 되는데 덕적면 어업조합, 강화군 강화어업조합과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193573일 매일신보)

면협의원 참여

1939년 당시 북도면 면협의원의 정원은 8명이었습니다. 이때 면협의원 선거가 이루어지는데 나동한은 김창오, 이양기, 최장일, 윤기영, 조맹출, 석만석, 김용연 등과 함께 당선되었습니다. (1939524일 매일신보)

 

2. 이중화(李重華)

이중화는 나동한 후임으로 북도면장이 됩니다. 그 당시 매일신보에서 보도할 정도로 이중화는 유명 인사였습니다. 인천경찰서 고등계에서 19개년간 일하다 210일부로 원 순사부장을 퇴임하고 32일부로 북도면장에 임명되었습니다. (193335일 매일신보)

이중화는 경찰로 재직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 수사, 고문을 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친일반민족행위자입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20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한 이재연을 체포하여 취조하였으며, 1924년에는 이대정, 이창회 등을 체포하였습니다. 1930년에는 이수봉을 체포하여 고문하였습니다. 이외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탄압하였습니다. 이러한 행적으로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이중화는 반민특위 신문에서 고등경찰이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일반 민중의 동태와 조선총독부 시책에 반대하는 자를 사찰하여 미연에 방지하려는 기관이라고 답하였습니다.

 

3. 북도면의 독립운동가

윤응념

윤응념(尹應念)은 본적이 황해도 재령군 군내면 내야리 출신으로 1923, 상해임시정부 명령을 받아 배편으로 인천에 밀항하여 독립자금을 모금합니다. 직책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부 참사였는데 국내로 들어오면서 권총 두 자루와 탄약 백여 발 그리고 문서 등을 가지고 들어와서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탄로되어 잡히게 됩니다. 이 일에 관여된 사람들은 윤응념 한 명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었습니다. 이 중 5명은 독립운동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윤응념은 경성지방법에서 제령위반 강도죄로 징역 98개월의 선고를 받고 경성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269월에 폐병으로 형의 집행정지를 받아 출감하여 서울의 홍파동 5번지의 18호에서 요양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회사 폭탄 의거를 실행하였는데 이를 보고 다시 만주로 건너갔습니다. (1923519일 매일신보), (1927125일 중외일보)

 

수괴는 교통부참사(윤응념) 무기와 불온문서로 인심을 선동하고 군자금을 모으려던 '인천강도사건 취조 종료' 
수괴는 교통부참사(윤응념) 무기와 불온문서로 인심을 선동하고 군자금을 모으려던 '인천강도사건 취조 종료' 
홀연 탈경한 윤응념, 재거설로 경찰 활동
홀연 탈경한 윤응념, 재거설로 경찰 활동

 

하지만 그 이후로 행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아직 독립운동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여기에 관한 내용은 아래 기사를 통해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독립운동과 인천(13) 윤응념과 인천사건 경인일보(2019523)]

 

<출처-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론>

이 름

본 적

공적 개요

최수연

경기도 부천 北島 信島 947

19237월 경기도 인천군에서 윤응념, 이동진 등과 함께 조선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7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호승

경기도 부천 北島 信島 295

19231월 하순 대한민국임시정부원 윤응념 등과 함께 경기 부천군 계남면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윤도중

경기도 부천 북도 신도 884

19231월 경기도 부천군에서 윤응념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동년 3월 인천군에서 동지들이 섬을 오가며 활동할 때 선박으로 이동을 돕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7년을 받음.

장수태

충청남도 공주 公州 大和 112

19228월경 충남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윤응념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송중직

황해도 송화 운유 사기 481

1921년 황해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았고 19233월 인천 앞바다의 섬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8년을 받았으며 192412월 형집행정지로 출옥한 뒤 다시 192510월 황해도 송화군, 은율군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받고 옥중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4. 어민 근로대 사진

북도면 어민들의 근로대 사진이 신문을 통해 남아 있습니다.

신사 참배하는 부천군 북도면 어민근로대
신사 참배하는 부천군 북도면 어민근로대

 

5. 폭리를 취하는 악덕 상인 적발

소주, 악덕 상인의 폭리에 관한 재미있는 기사가 있습니다. 1941년 여름이 되자 소주의 소비량이 많이 증가하였다고 합니다. 부천군의 섬과 인천과의 교통이 불편하였으므로 부천군 북도면 북도리 출신 상인인 나 모(50) 씨가 3월 이후로 인천과 강화를 돌아다니며 1되에 130전에 소주를 사서는 선원들에게는 2원에 되팔아서 한 되당 70전씩 폭리를 취했다고 합니다. 폭리만 2천여 원에 달한다고 하여 인천경찰서에 잡히게 되었습니다. (194172일 매일신보)

 

|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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