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찬란하게 말랐다. 비바람도 눈보라도 온몸으로 맞았음이다. 밟힘도 꺾임도 없이 원시림 같은 건초여서 찬란하다. 거목 한 그루 없이 넓은 습지를 차지한 갈대들과 잡목들이 겨울 철새들에게 품을 내어주며 안식의 계절을 보낸다. 어떤 바람도 소란 떨지 않을 것 같은, 고요하나 충만한 자유가 느껴지는 곳. 2월의 소래습지다.

입춘이 지나고 어스름이 검은 갯벌에 내리는 저녁, 갈대숲엔 겨울 철새들이 푸르르 날고 일과를 마친 물오리들은 갯벌 기슭에 삼삼오오 모였다. 갯벌 사이로 흐르는 바닷물에 초저녁 멱을 감는 녀석들이 변성기 덜된 목소리로 갯벌을 처댄다. 말썽꾸러기들일까. 저녁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일까. 갯골 물은 얕을지라도 사랑은 깊은 듯 은밀하다. 탓하는 자 없으니 저들의 자유가 행복해 보인다.

 

소금창고
소금창고

 

소래 염전을 이어주는 소염교를 지나니 소금 창고가 무너질 듯 세월을 버티고 섰다. 도시건설에 파괴되지 않고 염전의 자존심을 지키는 소금 창고가 가상하기까지 하다. 당시 염전을 가꾸는 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일제강점기 때였으니 소금에 짓눌린 삶이 부단히 고단했지 싶다. 염전을 지나 소금밭을 걸었다. 눈길을 걷는 듯 사푼사푼 발걸음을 받아들이는 소금밭이 순하고 보드랍다.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봤다. 소금인 걸 알면서도 눈이 아님을 확인하고 마는 의심 많은 도시인의 행위여서 멋쩍다. 소금밭에 뿌리내린 키 작은 갈대들의 겨울 정경이 펼쳐진다. 찬란한 마름의 절정이다. 병들게도 썩게도 하지 않는 소금밭에서 갈대처럼 흔들리며 살고 싶다면 하얀 손을 가진 자의 오만일까.

 

소래습지
소래습지

 

인천시 소래와 시흥시의 도심을 병풍 삼고 옴팡지게 자리한 소래습지는 놀랄 만큼 넓은 평원이다. 대략 350에 이른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일본에 의해 염전이 세워졌다. 서해안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수탈할 목적으로 수원에서 인천을 잇는 수인선을 개통하고, 소래철교를 건설하여 협궤용 증기기관차를 통해 소금을 수송해 왔다. 1970년대 소래 염전은 국내 최대의 천일염 생산지로 자리매김했으나, 1995년 수인선이 폐선 된 뒤 1997년에 소금 생산이 완전히 중단되어 폐염전으로 남았다. 일본에 소금을 수탈당하듯 삶을 수탈당한 사람들은 어느 도심에 묻혀 염전촌을 추억하며 살까.

 

염전학습장
염전학습장

 

사람의 손길이 중단되면 자연의 움직임은 발 빠르게 지속된다. 폐염전에도 바닷물이 밀려들며 해당화, 벌노랑이꽃 같은 염생식물들이 자생하고, 철새들과 양서류, 곤충류가 서식하면서 갯벌 생태환경이 조성되었다. 이런 풍요로운 습지가 도시건설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었을 텐데 뜻이 있는 누군가는 소래습지를 보존키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이다. 염전 학습장에서는 천일염을 직접 생산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인부들이 수차를 이용해 바닷물을 길어 올리며 1일 기준 400에서 1,200의 소금을 생산해 낸다. 소금을 채취하는 시간은 보통 오후 4시경으로 직접 가래질을 하고 소금을 채취할 수 있는 체험도 할 수 있다 하니 시간을 맞춘다면 좋은 경험이 될 듯하다.

소금밭에는 갈대와 퉁퉁마디, 개민들레, 칠면초와 갯개미취 등의 염생식물들이 자생하고, 갈대와 이팝나무, 해송, 말발도리, 해당화 순비기나무 등이 소래습지의 정원을 이룬다. 어느 때 어느 계절인들 아름답지 않을 정경인가. 혼자여도 외롭지 않을 낭만의 산실이다. 습지야말로 자연생태 보존을 넉넉하게 하여 인간들을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밑거름이지 않은가. 자생하는 생물이 소래습지를 침범했을지라도 환영할 일이다. 염전의 아낙을 닮은 해당화와 소금기 머금은 개민들레를 들여다보는 여유야말로 삶의 본질을 정화하는 일이지 싶다.

 

풍차
풍차

 

꽃단장한 풍차들이 갈대숲에 서 있다. 한국의 소래습지에 유럽 풍차들의 출현을 무어라 해야 할까. 돈키호테도 갸우뚱할 정도로 단장이 곱다. 풍차 때문에 소래습지가 유명세를 탄다니 다행스런 일이긴 하다. 기념사진 찍으라고 계절마다 폼잡는 코리안 풍차를 돈키호테도 그의 연인 둘시네 공주도 올 것 같지 않다고 투정할 일이겠나. 내가 산초마냥 지나치게 정상인이라 멋없지 뭔가. 엷은 달빛 드리운 풍차도 그럴싸하게 사진 한 컷 찍어본다.

겨울도 저만치 밀려나는지 바람이 찬기를 걷었다. 설핏한 봄바람에 키 작은 갈대들의 흔들림이 잦다. 날 것 그대로의 춤사위여서 겨울 무희들이라 해두겠다. 갈대숲에서 둥지를 틀었던 겨울 철새들도 떠날 채비를 하겠지. 머잖아 움츠렸던 함초가 습지를 융단처럼 덮고, 해당화도 염전의 애환을 잊은 듯 붉게 피어나리라. 되레 누군가에게 고통은 잊으라고, 대궁 실한 붉은 꽃을 피우라고 다독여 주리라. 정월 보름을 며칠 앞둔 달이 염전에 잠겼다. 염전의 애환마저 잠재운 찬란한 밤이다. 갯벌 기슭을 차지한 물오리들의 탁한 수다만이 어둠 내린 습지를 흔들어 도심의 소리를 밀어낸다. 소래습지에서의 순간순간이 행복의 절정이다. 시지프스가 유혹당한 세상이 이런 곳이었기를 바란다면 지나치다 할까.

 

최숙미(작가, 부천문인협회부회장)

최숙미 작가
최숙미 작가

 

프로필

2010년 계간에세이문예봄호 수필 등단, 2018한국소설2월호 소설 등단

수필집 칼 가는 남자』 『까치울역입니다,

소설집 데이지꽃 면사포정계순(친정어머니) 유고집 전전반측엮음

이메일 : sukmi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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