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의 설립과 활동 30

영흥도(靈興島)는 대부도 서쪽에 위치한 섬으로 그 중간에는 선재도가 있습니다. 2001년 선재도를 중간 거점으로 하여 선재대교와 영흥대교가 완성되어 육지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지명은 섬이지만 섬이 아닌 육지가 되어 편하게 오갈 수 있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영흥도는 바지락과 굴이 유명하며 수도권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화력 발전소가 있습니다. 덕적도, 대부도와 같이 자연 풍경이 아름다워 관광휴양지로 인기가 좋으며 해수욕을 할 수 있는 십리포해수욕장, 장경리해수욕장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서어나무 최대 군락지가 있습니다. 150여 년 전 영흥도에 해풍이 심해 방풍림을 조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나무를 심었으나 토질이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져 모두 고사하여 척박한 땅에서도 잘 견디는 서어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영흥도는 2001년 선재도를 중간 거점으로 한 선재대교와 영흥대교의 완성으로 육지가 되었다.
영흥도는 2001년 선재도를 중간 거점으로 한 선재대교와 영흥대교의 완성으로 육지가 되었다.

 

그렇다면 부천군을 구성하였던 영흥면에는 어떠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을까요? 여러 면장 중 임윤배(1924~1934)와 임원배(1936)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매립공사로 인한 고소고발사건

1936년 영흥면에서는 면장의 직을 떨어뜨리는 고소고발 사건이 발생합니다. 내용인즉 임윤배가 면장 재직 당시 면내 내리와 외리 일대의 간사지 4백 정보를 개간하면서 당국으로부터 거액의 보조금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박종완이 금전을 요구하며 협박하였고, 이에 영흥면장 임원배가 인천경찰서에 공갈의 고소를 제기하면서 불거졌습니다. 박종완은 임윤배가 면장 할 당시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그간의 속사정을 잘 알았다고 합니다. (1936724일 매일신보)

1933년 임원배와 임윤배가 매립지 허가를 받은 사실은 조선총독부 관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관보에는 임원배(부천군 영흥면 내리 701번지)와 임윤배(615번지)의 주소지까지 자세히 나옵니다. (조선총독부 관보 제1946호 소화 876)

한편, 위 고소고발사건은 인천경찰서 조사 결과 비리가 확인되어 임원배는 19361130일부로 의원면직 처리되었습니다. (19361211일 경성일보)

공갈고소를 일으킨 풍설 도는 개간지. 인천 서에서 양면으로 취조 중. 부천군 영흥면장 등
공갈고소를 일으킨 풍설 도는 개간지. 인천 서에서 양면으로 취조 중. 부천군 영흥면장 등

 

임원배 면직 기사
임원배 면직 기사

 

인천사리판매주식회사

1937년 면장에서 쫓겨난 임원배는 임윤배와 함께 193741일 인천사리판매주식회사(仁川砂利販賣株式會社)를 설립합니다. 회사는 인천부 항정 1정목 2번지에 위치하였으며, 토목 및 건축용 석재, 사리, 토관연와 등의 판매 운반을 주업으로 하였습니다. 자본금이 총 5만 원에 달하였으니 면장으로서 또는 지역 유지로서 그 경제적 기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장은 임원배가 하였으며, 이사로 임윤배, 조중묵(부천군 소사면 고척리 23번지), 조상기(인천부 유정28번지), 유인수(인천부 도산정 28번지)가 참여하였습니다.

 

부천학교평의원 당선

임원배는 1931년 부천군 학교 평의원 선거에 나가 당선되었습니다. (1931712일 경성일보)

 

영흥면 임가(林家)의 폭군

영흥면에서 임윤배와 임원배 형제뿐만 아니라 다른 임가들의 횡포가 많았다는 것을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흥면 선재리에 사는 백성현이 불법 체포 및 폭행과 협박죄로 영흥면 내리에 사는 임준배와 임선준 부자를 고소하게 됩니다. 백성현은 임준배와 남이 아니라 7촌 당고모부의 친척관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백성현은 지도 생으로 129월부터 내리의 임원배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는데 629일 오전 영시 반경에 임선준과 그의 친척 임원배의 장남 임선경, 임선장 등 3인이 달려와서 백성현을 불법 체포하고 임선준의 처 김봉녀와 간통했다고 협박하면서 폭행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백성현의 친부를 불법 체포하여다가 무수히 구타한 후 백 원 차용증서를 강요했다고 합니다.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었던 백성현은 결국 인천서에 고발하게 됩니다. (1938811일 매일신보)

 

전율할 아편의 참화. 백여 호가 전멸 지경. 부천군 영흥면 선재리의 아편촌. 유지 청년 궐기 대책
전율할 아편의 참화. 백여 호가 전멸 지경. 부천군 영흥면 선재리의 아편촌. 유지 청년 궐기 대책

 

아편의 참화

선재리는 가구 수가 100여 호로 주민의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였습니다. 겨울의 혹한과 여름의 혹서를 이겨내야 했으며, 특히 심한 추위를 피하는 방법은 술이었다고 합니다. 섬이라 술이 귀하였고, 특히 여름에는 토사곽란 등 급한 병이 많이 발생해 희생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때 오모라는 사람이 아편을 들여와 명약뿐만 아니라 추위를 막아주는 방한제가 된다고 선전하여 대부분 주민이 아편을 둘도 없는 영약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청년이 중독되었고, 병에 대한 저항력도 많이 약해졌다고 합니다. 실제로 1936년에는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아편을 처음 들여온 오 모 씨 3형제 또한 모두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보다 못한 청년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약 매매를 방지하고 해결하기 위해 인천에 진정하게 되었습니다. (193622일 조선중앙일보)

 

|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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