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열의 내 고장 부천 이야기 3

우리 부천은 선사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 지역의 명칭은 마한의 54개국 중 우휴모탁국(추정)을 시작으로 고구려시대(장수왕)에는 주부토군(主夫吐郡), 신라시대 장제군(長堤郡), 고려시대 수주(樹州) · 안남(安南) · 계양(桂陽) · 길주(吉州) · 부평(富平)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다.

지금의 명칭 부천(富川)’191431일 일제의 지명 사업에 따라 만들어져 2023년 올해로 109년이 됐다. 일제는 우리 지역 명칭을 부평의 ()’자와 인천의 ()’자를 따서 부천(富川)이라고 명명했는데, 당시만 해도 부천은 덕적도, 영흥도, 인천 일부, 서울 양천까지를 포괄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일제는 1941101일 부천군 소사면을 소사읍으로 승격했으며, 30여 년이 지난 후 197371일 부천군은 폐지되고 소사읍 일원만 가지고 부천시가 되는데, 당시 부천시 인구 65,080, 가구 수 12,712호를 가진 서울의 위성 도시로 산업화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으며, 1991년 지방자치 시대를 열면서 민선 시장들의 탈서울, 탈 공업위성도시 슬로건 아래 지속적인 문화 정책을 편 결과 지금의 국가 지정 문화도시 부천이 되었다.

 

고강동적석환구유구
고강동적석환구유구

 

선사시대 유구가 남아 있는 고강동 유적지는 1968년에 경인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범바위산(선사유적)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바람에 산 절반 이상이 깎이고 파헤쳐져 소실되었다. 당시에 얼마나 많은 유물이 덤프트럭에 실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생각할수록 아쉬운 일이다. 만약 도로 공사를 터널 공법으로 하여 산을 온전하게 보존했다면, 고강동 유적지는 연천, 미사리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대의 청동기 유적으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강동 유적지에는 청동기시대 제사 유적으로 추정되는 적석환구유구(蹟積石環溝遺構)’가 남아 있다. 이를 토대로 학자들은 이곳을 우휴모탁국의 왕도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조선의 단군왕검이라는 명칭에서 단군은 제사장을 뜻하는 말이다. 지배자란 뜻의 왕검이라는 명칭이 같이 쓰이는 것을 보면 당시에 제사장은 곧 지배자였음을 알 수 있다. 고로 왕도에는 제사장이 제를 올리는 터가 한 지역에 같이 있었다는 것으로 추론 해 본다.

이렇듯 중요한 역사 유적이 고강동에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다. 많이 훼손되었지만 남은 것만이라도 잘 보존하고 철저히 연구해서 부천의 자랑으로 만드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최의열(화가, 부천시의원)

 

최의열 의원
최의열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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