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군 다주면(多朱面)은 지금의 주안역 부근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옛날 지도를 보면 구월리, 간석리, 십정리, 사충리, 용정리, 장의리, 도화리 등 6개의 리()로 이루어진 면이었는데, 현재 지하철 1호선의 역이름을 연상하면 조금 더 이해가 빨라집니다. 제물포역은 육지 깊숙이 위치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바다의 포구였습니다. 개항이후 간척, 매립을 통해 인천은 형태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다주면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천군에 속해 있다가 193610월에 인천부로 편입되었으며 총4명이 면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주면에는 어떠한 역사적 이야기가 있을까요?

 

부천군 다주면 지도
부천군 다주면 지도

 

<역대 다주면장>

1919

1920~24

1925~30

1931~36

박붕수

성주범

정태윤

강신형

 

강신형은 1931년부터 36년까지 제4대 다주면장을 합니다. 그 이전인 1920년에는 경기도평의회 의원이 됩니다. 이 당시 경기도 의원은 총 34인으로 관선 12, 민선이 22명이었는데, 관선 12인 중 일본인이 8인을 차지한 것을 보면 이 또한 조선총독부의 영향이 도 평의회에 미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201221일 매일신보), 강신형은 오랜 세월 주안금융조합 사장도 역임하였습니다.

도평의회 의원 명단. 왼쪽 2줄에 '부천 강신형'의 이름이 보인다.
도평의회 의원 명단. 왼쪽 2줄에 '부천 강신형'의 이름이 보인다.

 

2. 염전(鹽田)

다주면은 염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염전인 주안염전은 1907년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1909년부터는 본격 생산에 들어갑니다. 지금의 염전은 천일염으로 이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조선시대까지는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드는 자염(煮鹽)이 유행했습니다. 자염은 전오염(煎熬鹽)으로도 불렸는데 연료값이 많이 들고 생산량이 적어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게 됩니다.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에 의해 주안염전은 1908년부터 1911년까지 26만 평, 1917년부터 1918년까지 37만 평 규모로 확장되었으며, 남동염전, 군자염전, 소래염전 등이 순차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에 우리나라 각지에 염전 생산지로 간사지를 지정하고 7년의 지속사업으로 염전 2,600정보의 축조를 계획하고 총 6159,326원의 예산을 세웠습니다. (1920112일 매일신보)

 

염전증축계획
염전증축계획

 


3. 회사

다주면은 인천부와 가깝고 경인철도 개통으로 물류 이동이 용이하여 많은 회사가 세워졌습니다.

1) 조선염업(朝鮮鹽業)

조선염업은 1927319일에 다주면 장의리 440에 설립되었습니다. 소금의 제조 및 판매, 제염 부산물의 처리 판매 등을 하였으며, 자본금 500,000원에 달했습니다.

사장은 산구중도(山口重道), 이사는 곡야만장(谷野滿藏) 산본번장(山本繁藏) 우야가길(宇野嘉吉) 송정수삼(松井秀三) 정출치(井出治), 감사는 영목탁랑(鈴木卓郞), 지전문랑(持田汶良)이 하였습니다.

 

2) 조선농산(朝鮮農産)

조선농산은 1930227일에 다주면 용정리 467에 설립되었으며 생과, 소채 등의 농산물과 약초류의 생산, 제조, 가공 및 매매 등을 하였습니다. 자본금은 50,000원이었습니다.

 

3) 인천요업(仁川窯業)

인천요업은 19322월에 다주면 장의리 314에 설립되었으며 기와를 제조, 판매하였으며 또한 건축재료를 판매하였습니다.

 

4) 옥치(玉置)

옥치는 부동산을 경영하고 금융투자를 목적으로 하는 회사로 다주면 장의리에 19334월에 설립되었습니다.

 

5) 오타후쿠와타

각종 면(綿)의 제조판매, 버선류 및 면사포의 판매를 하며, 본점은 福岡市 太字比惠 1148이며 지점은 다주면 장의리 216에 위치하였습니다. 자본금이 750,000원 달했습니다.

 

6) 평산농원

평산송태랑(平山松太郞)은 평산농원을 운영하였는데 1887년 일본에서 인천으로 건너와 잡화상을 시작하였습니다. 러일전쟁 당시에는 군의 어용상(御用商)을 하며 물자를 공급하였으며, 1897년에는 평산미점(平山米店)을 개업하여 미곡상을 운영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인천상업회의소(仁川商業會議所) 의원과 인천수산회사(仁川水産會社) 이사를 했습니다. 특히 1924년에 평산농원에서 동맹파업이 발생합니다. 노동자로 일하던 홍성녀(洪姓女)라는 여성이 강미민차(强尾敏次)라는 기수와 싸움 끝에 두어 시간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조사 결과 기수인 강미민차(强尾敏次)는 상해치사죄로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 조선인 노동자들과 중국 노동자들은 79일부터 12일까지 3일간 휴업하였습니다. 농원 측의 설득으로 복귀하게 되는데(1924726일 매일신보), 여기에 남녀 총 540인이 참여하였습니다. (1925118일 매일신보)

 

부천평산농원 조선인부 삼백여명 동맹파업 기사
부천평산농원 조선인부 삼백여명 동맹파업 기사

 

부천군 다주면의 회사, 농원들을 살펴보면 다수의 일본인이 조선으로 넘어와 대량의 토지를 소유하고 거대 자본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를 착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