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집은 은신처이고 가족은 추억의 저장고다. 나 홀로 사는 집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지친 몸과 마음을 풀 수 있는 고요한 휴식처와 같다. 소박한 수도승의 거처 같은 적막한 곳이지만, 붓꽃 향기가 그윽한 한옥에서 사는 일상을 꿈꾼다.

절망도 사치인 시절이 있었다. 대기업에 다니시던 아버지가 주식에 투자하면서 우리 가족은 불행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졌다. 연못이 있는 2층 양옥집에서 점점 규모를 줄여가다가 토굴 같은 반지하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죽으러 간다는 말만 남기고 시골로 내려가셨다. 남은 가족의 서울살이는 비참했다. 세 들어 살았던 반지하의 쪽문을 열면 흙바닥이 나오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려면 신발을 신어야만 했다. 부엌도 화장실도 없었다. 추운 겨울, 마당에 있는 간이 화장실에 가기 싫어서 저녁에 물도 잘 마시지 않았다. 사시사철 시퍼런 곰팡이와 더부살이하였다. 절망할 틈도 없이 끼니를 걱정하며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에 급급하기만 했다.

가난은 바퀴벌레와 같았다.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징그러운 바퀴벌레 보듯 피했다. 매일 공책 모서리에 멋진 저택을 낙서하던 막내 여동생이 대학에 합격했다. 엄마는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못 하시던 엄마가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친척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공장에 보내라는 모진 말만 들었다. 여동생은 절대로 공장에 갈 수 없다며 악을 쓰고 울어댔다. 닭똥 같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시던 엄마는 독한 마음을 먹었다. 한 달에 한 번 쉬는, 힘든 환자의 병간호 일을 찾았고 월급을 미리 앞당겨서 입학금을 마련했다.

공수래공수거의 운명은 가혹했다. 아버지는 시골의 비닐하우스에서 지내며 꿩을 사육하기 시작했다. 만만치 않았다.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흘린 땀방울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꿩을 키웠지만, 판로가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도살해야만 했고, 돼지도 키웠으나 그해 유행했던 돼지 전염병으로 모두 폐사했다. 손을 대는 것마다 망했고 빚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버지는 날마다 술로 슬픔을 달랬다. 직장암에 걸려 큰 수술을 두 번이나 했으나 1년 만에 간으로 전이되었다. 간암 3기에 몸무게가 37킬로그램으로 수척해져서 앙상한 모습으로 병원 무균실에 누워 계셨다. 목소리조차 잃은 아버지가 눈을 감으시면서 종이에 마지막으로 글 한 줄을 남겼다. 유언은 기가 막혔다.

가난하게 산 것을 감사해라

 

사진출처(픽사베이)
사진출처(픽사베이)

 

빚쟁이라는 족쇄가 숨통을 조여 왔다. 보험도 가입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수술비와 병원비도 어마어마한데다, 이것저것 사업하느라 빌린 은행 대출금도 감당 못 할 수준이었다. 엄마는 24시간 환자를 돌보며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주무셨고 커피를 보약처럼 마시며 피곤을 이겨내려 안간힘썼다. 산더미 같은 빚을 하루하루 한 주먹 모래만큼씩 갚아가면서도, 네 남매의 대학 뒷바라지까지 하셨다. 엄마는 쪼들리면서도 살뜰히 저축하여 신림동 산꼭대기에 오래된 빌라 하나를 마련하여 이사했다. 비록 10평이 채 안 되는 방 한 칸짜리 집이었지만, 행복을 꿈꿀 수 있었다.

가난은 추억으로 남았다. 빚이 3천만 원쯤 남았을 때 우리 가족이 살았던 반지하 집이 재개발로 헐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창피했던 과거가 말끔히 철거되어 시원했다. 수치스러웠던 증거물이 남지 않아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지하의 기억은 연기처럼 빠르게 사라져갔다.

2022년 여름, 하룻밤 새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서 큰 인명피해가 났다. 저지대와 반지하 주택가의 피해가 극심했다.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에 들이닥친 폭우로 발달장애 일가족이 사망한 사건을 뉴스로 접했다. 안타까웠다. 갑작스러운 빗물 침수로 공포에 질려 죽어가는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잊고 지냈던 반지하의 서러움이 북받쳤다. 기억 속에 앙금처럼 가라앉았던 끔찍했던 경험이 하나둘 떠올랐다. 장애인 가족은 지옥 같은 현실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 참담한 영혼들이 천국으로 건너가 편히 쉬기를 기도했다.

아버지 장례식에서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뼈저린 불행의 원인을 아버지 탓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유언이 귓가에 맴돌았다. 몸서리쳐지는 가난에 도대체 무엇을 감사하란 말인가.

1970년대에 풍족하게 살 때, 부유층의 전유물이던 컬러텔레비전이 우리 집에 있었다. 후덕한 엄마는 한일전 축구 경기라도 있는 날이면 동네 사람을 초대했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나는 초라한 차림의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것을 싫어했고 거만하게 주인행세를 하였다. 굴곡 없이 자라서 부유하게 사는 나를 상상해보았다. 사람들은 자기 잇속만 움켜쥐는 나를 볼 때마다 마치 바퀴벌레라도 본 듯 역겨워하지 않았을까.

가난의 경험은 나를 강하게 하는 밑거름이었다. 궁핍으로 손가락질을 당하거나 동정을 받고 싶지 않았다. 굶어 죽더라도 남에게 손 벌리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애를 썼다. 이웃의 팍팍한 사정을 십분 헤아릴 수 있었고 도우려는 마음을 가졌다. 위선의 탈을 쓴 동정심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날의 아픔도 내 인생의 일부분이었음을 받아들인다. 힘들고 나약해질 때마다 아버지의 유언을 곱씹는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가난은 내게 값진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가난으로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애란(화가, 미술 심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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