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새초롬하게 피어나는 배꽃이 도담도담하다. 청초하고 우아하여 은근한 기품이 있다. 흙살 고운 땅의 숨결을 머금고 명지바람에 수줍은 미소를 흩날린다. 배꽃 옆을 스치면 속된 티끌 하나 없이 맑고 달큼한 향기가 살포시 안겨 온다. 바지랑대에 걸친 빨랫줄에서 탕탕한 햇볕을 즐긴 옥양목의 새물내처럼 담백하다. 굽이치는 꽃물결에 맑고 순한 바람이 불면, 일렁이는 꽃구름처럼 아련하다.

오래전 땅보탬 하신 아버지의 고향에 들렀다. 무심한 산자락에 봄바람을 즐기는 진달래가 으밀아밀 산빛을 깨우고 있었다. 골짜기에 점점이 박힌 생강나무꽃이 여린 미소를 흘리고, 까치가 낯선 사람의 방문에 기척을 했다. 마을에 들어서자, 흐르는 공기마저 부드러워 포근했다. 집에 배나무를 길렀다고 했다. 살다가 떠난 집 주인의 후손이 찾아와 흔적을 더듬는 사정을 알 리 없고 반길 리도 만무하지만. 마음이 쏠려 집터를 기웃거렸다. 배나무는 보이지 않고 푸릇푸릇한 마늘 이파리가 봄볕을 쬐고, 새뜻한 봄이 굽이치고 있었다.

마을 정자 옆 늙은 배나무에 꽃이 피었다. 묵은 세월을 품어 거칠어진 나무껍질에 연륜이 가득 배어있었다. 배꽃은 장미나 양귀비처럼 화려하여 매혹적이거나 강렬하지도 않았다. 연한 햇살이 스며든 연둣빛 잎과 새하얀 꽃잎의 조화가 매초롬했다. 다섯 장의 흰색 꽃잎이 검은색 꽃밥을 둘러싼 어울림은 단아했다. 은은한 숨결마저 조용하고 잔잔하게 번졌다. 꽃 속은 텅 빈 것처럼 밋밋하면서도 품격을 갖췄다. 배꽃이 그려낸 진풍경의 언어를 기어코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배꽃(사진출처 픽사베이)
배꽃(사진출처 픽사베이)

 

연세 지긋한 노인이 오시더니 배꽃은 수수하고 조신하여 복사꽃처럼 요염기도 없고 남사스럽지 않지요.”라고 하였다. 복사꽃은 춘흥을 주체하지 못한 아가씨처럼 발랄하지만, 배꽃은 다소곳하고 음전하여 정숙한 여인을 닮았다. 배꽃은 보면 볼수록 군더더기 없이 맑고 깔끔하여 마음조차 정화한다. 순백의 자태를 드리운 꽃은 청빈하면서도 정갈한 기품을 지녔다. 옛사람들이 경계하여 복사꽃을 동구 밖에다 심었고, 배꽃은 집 가까이에 두고 즐겼다는 서사는 괜한 너스레가 아니었다.

민들레꽃을 탐닉한 꿀벌은 다리와 온몸에 노란 꽃가루를 공처럼 매달고 있었다. 진흙탕에서 한바탕 뒹굴고 놀다가 온 개구쟁이처럼 보이는데, 배꽃은 꽃밥이 적어 다녀온 흔적조차 별로 보이지 않았다. 꽃가루가 풍성하지 않고 꿀조차 많이 품고 있지 않다. 배꽃 향기는 곤충을 불러들일 좋은 성분과 매혹적인 향도 없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다른 꽃에 비해 벌과 나비도 마구잡이로 접근하지도 않는다. 다른 과일과는 달리, 사람들이 꽃가루받이를 도와주어야 어느 정도 결실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붕붕거리던 꿀벌의 춤사위와 저공비행도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았다.

 

꿀벌(사진출처 픽사베이)
꿀벌(사진출처 픽사베이)

 

꿀벌 한 마리가 하고 귓가로 날아들었다. 노인이 최근에 꿀벌이 집단으로 사라져 직접 수분(受粉)해주어야 하는데 엄두조차 나지 않아요. 붓끝에 꽃밥을 묻혀 장가를 보내야 그나마 결실을 볼 수 있는데, 정말 큰 일입니다.”라고 걱정했다. 겨울철 이상 고온 등 기후변화로 꿀벌들이 집단으로 폐사하고, 꿀벌에게 해충인 응애를 제거하려고 과도하게 농약을 뿌린 것과 관계가 있다고 했다. 꽃들도 제각기 꽃 피우는 시기가 정해져 있는데, 지구온난화로 들쭉날쭉 정신 차리지 못하고 피다 보니, 꿀벌들도 당황하여 혼돈에 빠진 것 같았다. 절망감을 안겨주는 가혹하고 스산한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붓끝에 꽃가루를 묻혀 암술에 갖다 대면 신비한 힘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암술머리의 촉수에 점액이 묻어 있는데 꽃가루를 묻힌 붓끝을 가까이하면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미세한 힘이 느껴진단다. 마치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들러붙는 암술을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연의 오묘한 법칙은 신비스러움, 그 자체였다. 실로 놀라운 본능이었다. 꿀벌은 농작물의 꽃가루받이에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겨우내 움츠린 침묵 속에서 야윈 꽃눈을 키우다가 보란 듯이 꽃을 피웠지만, 가루받이가 원활하지 못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기만 했다.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 열매 맺고 성장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듣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무심코 베어 물었던 배의 달큼한 과육은 실로 눈물겨운 결정체였다. 몽실몽실 피어난 꽃구름처럼 아름다운 터널을 이루던 배꽃이 간직한 슬픈 현실은 두려움이었다.

숨탄것들에 주어진 의무는 후손을 남기는 일이다. 나약한 존재일수록 쉽게 사라지고 멸종에까지 이른다.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희생당하여 곤충과 꽃이 공생하는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노인이 배꽃을 제대로 느끼려면, 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달빛이 처연하게 감싼 모습을 꼭 보세요.”라는 말에도 어두운 기색이 스몄다. 꿀벌이 사라지는 것이 인류에게는 식량 위기로 결국, 생존과 맞물려 있다. 첨단 기술인 드론을 활용하여 배꽃에 가루받이하는 모습이 씁쓸했다. 지구를 살리는 꿀벌들이 날아들기를 바람으로 안고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생각의 추가 무거워졌다.

불임으로 고생하던 후배가 수차례에 시험관 아기를 시도한 끝에 자녀가 태어났다. 모두가 진심을 담아 축하하면서 앞날을 기원했다. 성장하면서 장애가 의심되어 병원을 드나들다가 푸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다운증후군을 진단받고 망연자실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애처로운 배꽃을 바라보는 마음이 착잡하고 슬펐던 이유다. 제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열매를 맺기 위한 꽃의 필사적인 노력은 아름다웠다. 모진 바람 불어도 꽃 피어나듯이 꽃의 간절함은 눈물겨웠다.

노인이 농사는 욕심 부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 자연이 도와줘야 얻을 수 있고 먹고살지요.”라고 하던 말씀이 팔랑거리는 나비처럼 뒤따라왔다. 욕심을 버리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사는 게 사람의 도리라는 전언이 메다꽂듯이 아팠다. 가지가 휘도록 달린 배꽃이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환한 웃음을 나풀거린다. 지그시 눈 감으면, 배꽃이 펼친 무도회에 초대받은 벌과 나비의 춤사위가 눈부시게 아름답다. 명주바람과 햇볕의 이중주에 맞춰 배꽃이 난분분히 흩날리고 있다.

 

김태헌(수필가, 한국공무원문인협회, 경기수필가협회 회원)

 

김태헌 수필가
김태헌 수필가

 

김태헌 프로필

10회 등대문학상 우수상, 20회 공무원연금문학상 은상, 12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 특선, 6회 전국 통일문예작품 공모 최우수상, 6회 경기수필공모 대상, 1회 한국디지털문학상 은상, 1회 순천스토리텔링 우수상, 2022년도 평택사랑 전국백일장 공모전 장원 등 다수 수상. 이메일: hunny50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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