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동네 내리막길 위를 리어커에 폐종이상자를 가득 싣고 내려오는 여자가 있다. 헐렁하게 묶은 짐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몇 발자국 못 가 편도 2차선 도로 위에 폐종이박스가 고무줄 풀리듯 미끄러져 내렸다. 여자는 당황할 것도 남의 눈치 볼 것도 없이 느긋해 보인다.

나는 집을 향해 올라가다가 멈추었다. 도와줄까. 모른 척 그냥 지나칠까. 주변 상황으로 보아 아무도 그녀를 도와줄 것 같지 않다. 차선을 막고 있어 마냥 내버려 둘 수도 없다. 그래도 자기가 처한 상황 내에서 열심히 일하는 그녀가 좋아서 거들었다. 그녀는 씨익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뒷골목에 사는 분이라는 여자다.

그녀는 내가 동네 통장을 맡으면서 한두 번 오다가다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내게 3급 정신장애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인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 탓에 자녀 한 명은 친인척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남편은 도배일을 도우며 살고 있다고 했다.

40대의 그녀는 세상 걱정 없이, 세상에 대하여 징징거릴 일도 없이, 동네 어디든 잘 끼는 펑퍼짐한 아줌마 모습이다. 그런 모습은 자칫 푼수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속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왜 젊은 사람이 놀고먹느냐고 말한다고 한다.

그녀는 어디를 가든 자전거 뒤에 폐종이박스를 널브러지게 묶어 부지런히 실어 나른다. 모아서 고물상에 팔면 5천 원 정도 받는다고 했다. 그 일이라도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웃는다. 그러고 보면 보통사람들과의 욕구가 다르지 않음을 뜻한다.

어느 날인가, 그녀의 세 식구가 느긋하게 걸어서 외식을 간단다. 급할 것도 부족함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묶은 짐바만큼이나 헐렁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도 태초의 사람들은 저런 모습으로 살지 않았을까. 자연을 닮은 모습이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사진출처(픽사베이)

 

요즘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한 치의 틈도 없이 살아간다. 어디인가 틈이 있어야 여유가 생기고, 그 틈에 무엇인가 비집고 자리할 수 있다. 똑똑한 어느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혼자 산다면서 쇠고기 반 근을 사다 드렸다는 말이 있다. 며느리의 눈에는 시어머니의 한 끼 식사만 보였겠지 싶다. 시어머니를 통해서 옆 사람한테 갈 수 있는 틈새는 고등 수학에 없기 때문이다.

수학은 논리가 정확한 숫자로 나와야 우등생이 된다. 정확하지 않으면 잘 난 축에 들지 못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묘한 웃음부터 나온다. 똑똑한 사람들한테서 넘쳐흘러야 할 것들이 무엇인가 흐르지 않고 반비례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뾰족하게 돋보이기를 원하고 숫자를 더 높이 쌓기를 바라고 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 또 다른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쉽지 않은가 보다.

어쩌면 분이는 태초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오늘 먼 곳에 있는 생각을 한번 해보았다.

 

황정순(수필가, 부천작가회의 회원)

 

황정순 수필가
황정순 수필가

 

황정순 프로필

2005수필시대로 등단

부천수필가협회 회장 역임

() 복사골시민기자, 흰모래 수필동아리 지도교사

수필집 예지몽(2010), 노란 밥꽃(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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