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유정 문학의 산실, 실레마을 문학기행

5월이 다 가기 전에 부천문인협회 소속 작가들과 함께 춘천 실레마을로 김유정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한 번의 짧은 여행으로 김유정의 삶과 문학을 얼마나 알고 이해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고 여행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바탕으로 이것저것 자료를 수집하고 궁금한 점에 대한 답을 찾다보니, 김유정과의 거리가 조금은 좁혀진 듯한 느낌이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이번 여행 소감을 다섯글자(정확히는 다섯글자 이상이었는데 잘못 알아들음)로 말하라는 차장님(버스 차장 아님)의 요청을 받고 나름 재치를 발휘한답시고 실레합니다라고 했더니 다들 나를 바지에 실례나 한 사람처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실레마을 이미지(사진출처 김유정 문학촌 홈페이지)
실레마을 이미지(사진출처 김유정 문학촌 홈페이지)
실레이야기마을(사진출처 김유정 문학촌)
실레이야기마을(사진출처 김유정 문학촌)

 

김유정 문학촌은 십여 년 전, 내가 아직 선생님이던 시절에 문예반 아이들을 이끌고 방문한 적 있다. 그때와 비교해 지금은 상전벽해라 할 만큼 규모도 커졌고, 각종 전시 자료 역시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또 이웃한 금병산과 실레마을을 연결하여 여러 갈래 문학길을 만들어 놓았고, 경춘선 폐선로에는 레일바이크를 설치해 볼거리 즐길 거리 또한 많아졌다.

하지만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방문객들이 김유정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 얼마나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더불어 한국문학의 가치를 체득하고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저 문학촌이 금병산 등산이나 레일바이크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잠시 눈요기나 하고 지나가는, 곁다리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실레마을의 '실레'는 '시루[甑]의 사투리다. 금병산 자락에 시루처럼 움푹 파묻혀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사진은 김유정 문학촌 입구에 조성된 '낭만누리'. 뒤에 보이는 산이 금병산이다.
실레마을의 '실레'는 '시루[甑]의 사투리다. 금병산 자락에 시루처럼 움푹 파묻혀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사진은 김유정 문학촌 입구에 조성된 '낭만누리'. 뒤에 보이는 산이 금병산이다.

 

#김유정 문학촌을 돌아보며 들었던 몇 가지 의문?

 

김유정 문학촌은 올해부터 원태경 시인이 촌장을 맡고 있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부천 문인들을 직접 안내하며 이것저것 설명해주는 그의 말씨가 고분고분해서 좋았다. 미음()자 형으로 된 김유정 생가 툇마루에 앉아 촌장으로부터 유정의 가계, 어린시절, 서울살이, 부모의 죽음, 형의 방탕과 가산 탕진, 병마와의 싸움, 귀향 등 여러 이야기를 듣는 동안 수천석지기 부잣집 저택치고는 왠지 좀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후에 그의 자전소설 ()을 읽고 나서야 의문이 풀렸다. 유정은 소설에서 아버지를 당대 수십만 원을 이룩한 금만가[거부]이면서도 뚝뚝한[대단한] 수전노로 묘사하고 있다.

복원한 김유정 생가
복원한 김유정 생가
복원한 김유정 생가
복원한 김유정 생가
김유정 생가에서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원태경 촌장)
김유정 생가에서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원태경 촌장)

 

생가 옆 전시관은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올 초에 재개관해서 내부가 산뜻하다. 오랜만에 생가를 다시 찾은 어떤 관람객은 전시관 앞에 서 있던 동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마도 문학촌 입구 낭만누리에 우뚝 서 있는 동상을 허뿔리[허투루] 본 모양이다.

전시관 내부에는 김유정의 일대기가 그림과 함께 잘 설명되어 있는데, 다만 그의 출생지가 강원도 춘천부 남내이작면 증리로 표기되어 있는 것은 옥에 티다. 김유정 출생 당시인 1908, 실레마을은 강원도 춘천군 관할이었으므로 당연히 주소는 강원도 춘천군 남내이작면 증리가 되어야 한다. ‘강원도 춘천부1946년부터 1949년까지, 춘천읍을 부로 승격하면서 사용했던 행정구역 명칭이다. 실제로 같은 전시관에 진열된 김유정의 연희전문학교 학적부에는 보증인인 형 김유근의 주소가 춘천군 신남면 증리로 되어있다. (글을 쓰는 동안에 이 사실을 김유정 문학촌에 알렸더니 오류를 확인하고 곧 수정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김유정 작품 연보
김유정 작품 연보
전시관에 진열된 김유정 유품 1호 엽서. 설명하는 글에 "1936년 2월 11일 대구에 사는 친구 김학수가 춘천 실레마을 김유정에게 보낸 엽서"라고 되어 있으나 내용상 김유정이 실레마을에서 야학을 운영할 시기(1931~32)애 보낸 것으로 보인다. 
전시관에 진열된 김유정 유품 1호 엽서. 설명하는 글에 "1936년 2월 11일 대구에 사는 친구 김학수가 춘천 실레마을 김유정에게 보낸 엽서"라고 되어 있으나 내용상 김유정이 실레마을에서 야학을 운영할 시기(1931~32)애 보낸 것으로 보인다. 

 

#김유정은 경춘선 열차를 타고 서울에 오갔을까?

 

문학관 근처 한정식집에서 코다리구이 정식으로 맛있게 점심식사를 한 후 김유정역으로 향했다. 김유정역은 일제 강점기에 개통한 경춘선 24개 역 중 하나로 의암과 성산(남춘천)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본래 이름은 신남역이었으나, 2004121일 김유정역으로 이름을 바꿨다. 경춘선 복선화에 따라 2010년 새 역사가 건립되었으며, 구역사는 준 철도기념물로 지정되어 무궁화호 객차, 디젤기관차와 함께 보존되고 있다. 무궁화호 객차 1량은 춘천 관광안내소와 휴게실로, 나머지 1량은 북카페로 쓰인다. 북카페에는 춘천을 비롯한 강원 지역 작가들의 작품집이 2천여 권 비치되어 있어 강원도 문학의 저력을 실감케 한다.

 

옛 김유정역
옛 김유정역
옛 김유정역. 준 철도기념물로 지정되어 무궁화호 객차, 디젤기관차와 함께 보존되고 있다.
옛 김유정역. 준 철도기념물로 지정되어 무궁화호 객차, 디젤기관차와 함께 보존되고 있다.
옛 김유정역의 느티나무
옛 김유정역의 느티나무

 

얼마 전, 목포에 갔다가 해상케이블카를 타고 고하도에 내려 두어 시간가량 용오름 둘레길을 걸은 적이 있다. 해안데크를 따라 바다 위를 걷는 즐거움도 컸으나 간간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벗 삼아 호젓한 산길을 걸을 때는 참으로 오랜만에 나와 우주가 한 몸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산책로 중간중간에 목포 문인들의 시를 나무에 새긴 목판 시화가 설치되어 있는데, 한 편 한 편 시를 읽을 때마다 우리 부천문인은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보나?’ 하는 부러움이 앞섰다.

옛 김유정역 역사 내부
옛 김유정역 역사 내부
전시된 무궁화호 객차 내부. 춘천 관광안내소와 휴게실로 꾸며져 있다.
전시된 무궁화호 객차 내부. 춘천 관광안내소와 휴게실로 꾸며져 있다.

 

북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있을 때, 차창 밖으로 경춘선 열차가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그때 문득 떠오른 궁금증 하나, 김유정은 과연 경춘선 열차를 타고 서울에 오갔을까?’

김유정은 1908212(음력 111), 지금의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서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에 8남매(26) 중 일곱째,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해 겨울에 조부 김익찬이 사망하고 가족 모두 서울로 이사하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당시 풍습대로 삼년상을 치르고 떠났을 경우 유정의 나이 3~4세 때인 1910년 무렵이 되지 않을까 한다.

1910년 무렵, 경춘간에는 철도는 물론 자동차도 없었다. 그러므로 당시 김유정 일가가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걸어가거나, 배를 타거나, 아니면 가마인력거우마차 등을 이용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는 경인선으로 노량진을 출발한 열차가 오리꼴을 거쳐, 소사-부평-소뿔-싸리재-제물포에 이르는 총연장 33를 달리기 시작한 때는 1899년이다. 뒤이어 경부선(1905), 경의선(1906), 경원선(1913), 호남선(1914) 등이 잇달아 개통되었으나, 경춘선은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1939년에서야 민간자본에 의해 건설되었다.

춘천~서울 간 자동차 영업이 시작된 것은 철도보다 20여 년 앞선 1917년의 일이다. 미국인 건축설계사 테일러가 승합차 영업을 시작했으나 당시만 해도 길이 좁고 험해서 정기적으로 운행하지 않고 승객이 차면 가는 일종의 합승 택시였다.

19289, 15인승 두 대, 20인승 한 대 등 3대의 버스가 하루 3회씩 운행하면서 처음으로 경춘간에 정기노선 버스가 등장했다.

1930년부터 1932년 사이는 김유정이 고향 실레마을에서 야학[금병의숙]을 운영하고 농우회, 노인회, 부녀회 등을 조직하여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던 시기다. 이때 김유정은 버스를 타고 서울과 춘천을 오갔을 것이다.

김유정은 29세 때인 1937329, 지병인 결핵과 치루(痔漏)의 악화로 사망한다. 경춘선은 그의 사망 2년 후인 1939년에야 개통되었으므로 김유정이 자신의 이름을 딴 김유정역(개통 당시 신남역)에서 기차를 타고 내리는 일은 안타깝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개통 당시의 경춘선 노선도. 의암과 성산 사이에 김유정역[신남역]이 있다. 성산은 지금의 남춘천역.
개통 당시의 경춘선 노선도. 의암과 성산 사이에 김유정역[신남역]이 있다. 성산은 지금의 남춘천역.

 

# 김유정 소설, 어떻게 읽어야 할까?

 

김유정역을 나와 다시 문학촌으로 돌아가니 소설 을 소재로 한 조형물이 눈에 띈다. 1935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단편으로 들병이 계숙에게 빠져 집안의 솥단지까지 갖다 바치는 못난 남편 근식이가 주인공이다.

 

근식은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들병이 계숙을 따라나서기로 결심한다. 자식 수저 한 벌만 남기고 밥해 먹는 솥까지 빼돌려 계숙에게 갖다 바치는데 계숙과 떠나기로 한 아침, 갈라섰다는 계숙의 남편은 벌써부터 찾아와 짐을 챙기고 근식에게 함께 가지고 한다. 때마침 두 주먹을 흔들며 달려온 아내에게 아니야 글쎄, 우리 솥이 아니라니깐 그러네 참-”하며 근식은 쓴 입맛만 다신다.

 

김유정은 1933, 첫 소설 산골나그네를 시작으로 1937년 사망할 때까지 31편의 단편 소설을 발표한다. (2021, 소명출판에서 펴낸 정전 김유정 전집에는 32편 수록) 그는 고향인 강원도 춘천지방 사투리를 이용해 특유의 순박하고 해학적인 인물을 형상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데, 그 이면에는 토박이말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작가의 빼어난 어휘력이 자리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1년 출간된 김유정 어휘사전(도서출판 박이정)에 실린 표제어 8,299개를 분석해 보면 토박이말 6,895(83.08%), 한자말 1,369(16.50%), 외래어 36(0.42%) 순으로 토박이말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김유정이 생애 대부분을 서울에서 생활했고, 그가 고향 실레마을에 머물렀던 기간이 1930년부터 1932년 사이, 고작 1~2년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뛰어난 토박이말 구사능력은 참으로 놀라울 정도다.

 

들병이 계숙과 계숙의 남편. 계숙은 등에 아이를 업고 남편은 근식이 갖다바친 솥을 지고 있다.
들병이 계숙과 계숙의 남편. 계숙은 등에 아이를 업고 남편은 근식이 갖다바친 솥을 지고 있다.
남편이 계숙에게 솥을 갖다바친 사실을 알고 달려온 아내에게 “아니야 글쎄, 우리 솥이 아니라니깐 그러네 참-”하며 근식은 쓴 입맛만 다신다.
남편이 계숙에게 솥을 갖다바친 사실을 알고 달려온 아내에게 “아니야 글쎄, 우리 솥이 아니라니깐 그러네 참-”하며 근식은 쓴 입맛만 다신다.

 

김유정이 이렇게 토박이말을 활용해서 만들어 낸 독특한 작품세계는 당시의 문학계 흐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본다. 흔히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은 윤동주(1917~1945)이고, 시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시인은 백석(1912~1995)이라고들 하는데, 김유정과 마찬가지로 백석은 고향 평안도 토박이말을 아름다운 시어로 탈바꿈시켜놓은 천재 시인이다. 1936년 출판한 그의 첫 시집 사슴100부 한정판으로 가즈랑집, 여우난곬족, 고야(古夜), 정주성(定州城), 여승등 이미 우리 귀에 익숙해진 주옥같은 시 33편이 실려있다. 당시 용정 광명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윤동주는 이 시집을 구하지 못해 도서관에서 시집 전체를 공책에 옮겨적었을 정도라고 한다.

백석은 1930년 조선일보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유학했고, 1934년 귀국해서는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계열사 잡지 여성편집자로 일했다. 김유정이 소설 소낙비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1등 당선한 것이 19351월이고, 백석이 조선일보에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며 시인으로서의 본격 활동을 시작한 것이 같은 해 8월이니 거의 동 시기에 한 사람은 시를 통해서, 또 한 사람은 소설을 통해서 전국적인 토박이말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김유정 동상. 문학촌 입구 낭만누리에 있다.
김유정 동상. 문학촌 입구 낭만누리에 있다.
김유정문학촌 앞에 선 부천문인협회 회원들. 사진앞줄 왼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윤명석(시인), 홍명근(시인), 전해미(수필가), 조옥임(수필가), 임동석(시인), 정령(시인), 박희주(소설가), 최숙미(수필가), 함은숙(수팔가), 윤석금(시인), 김명환(시인), 박미현(시인), 곽욱열(시인), 김성배(시인), 박영녀(시인), 이봉우(시인), 박선희(시인), 정무현(시인), 김혜영(시인), 현해당(시인)
김유정문학촌 앞에 선 부천문인협회 회원들. 사진앞줄 왼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윤명석(시인), 홍명근(시인), 전해미(수필가), 조옥임(수필가), 임동석(시인), 정령(시인), 박희주(소설가), 최숙미(수필가), 함은숙(수팔가), 윤석금(시인), 김명환(시인), 박미현(시인), 곽욱열(시인), 김성배(시인), 박영녀(시인), 이봉우(시인), 박선희(시인), 정무현(시인), 김혜영(시인), 현해당(시인)

 

김유정은 스물아홉 해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어려서는 부모를 일찍 여읜 슬픔 속에서 고독하게 자랐고, 청년기에는 가난과 병마와 싸우며 불우한 삶을 살았다. 성격적으로도 몇몇 특정 여성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하는 등 문제가 없지 않았으나 이런 부정적 요인을 승화시켜 그만의 독자적인 문학을 탄생시켰고, 그 결과 오늘날 한국문학사의 한 획을 긋는 인물로 우뚝 섰다.

김유정 소설이라고 하면 흔히 토속성과 해학성을 먼저 거론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담긴 당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의 단편 만무방은 체면도 염치도 없이 막된 사람, 즉 아내와 헤어지고 파산을 선언하고 도박과 절도로 전전하면서 동생 응오에게 빌붙어 무위도식하는 형 응칠이를 내세워서 만무방(萬無方)’이라는 말뜻 그대로 백방으로 노력해도 살아갈 방도가 없는당대 민초들의 막막한 현실을 풍자한 소설임을 알아야 김유정 문학의 본령에 좀 더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누군가 강원도 춘천은 김유정이 먹여 살리는데, 우리 부천은 누가 살리나?”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몹시 뒤통수가 따가움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다 보았으나 문인들의 시선은 모두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현해당(시인, 부천문인협회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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