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성 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시튼 동물기에 보면 늑대 왕 로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솔직히 시튼의 동물기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왜 인간은 동물과 공존할 생각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동물기를 보면 인간들의 횡포로 인해 수많은 동물이 죽어 나간다. 이야기할 필요 없이 공존이 최선이다. 공존이 깨어지면 인간에게 유리할 것 같지만 자연 전체로 보아 균형이 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결국 인간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리 현명하지 못한 존재이다. 욕심을 자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동물은 죽어 나갔고, 멸종되기에 이른다.

로보는 늑대 중에서도 가장 용맹하고 똑똑한 늑대였다. 백인들에 의한 무자비한 사냥으로 인해 늑대들도 자신들의 먹잇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에 늑대들은 생존을 위해 백인들의 가축을 잡아먹지 않을 수 없었다. 백인들은 자신들의 가축을 지키기 위해 늑대 사냥을 나선다. 하지만 늑대 왕 로보에 의해 백인들의 시도는 종종 실패로 끝나게 된다.

로보는 인간이 늑대를 잡기 위해 만들어 놓은 덫을 교묘히 망가뜨리는 지혜도 있었고, 인간이 사는 지역에 서슴지 않고 나타나 먹잇감을 위해 인간의 가축도 순식간에 물고 가는 용맹도 갖추고 있었다. 인간들은 늑대 무리를 없애기 위해서는 그의 우두머리인 로보를 잡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늑대 왕 로보는 잡히기는커녕 인간들을 조롱할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로보에게 약점이 있었다. 바로 로보의 짝이며 자신의 새끼를 낳은 하얗고 아름다운 암컷 늑대인 블랑카였다. 사람들은 로보를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먼저 블랑카를 잡아야 한다는 계략을 세운다. 결국 블랑카는 올가미에 걸려 사람들에 잡혀 죽게 된다. 블랑카를 잃은 로보는 모든 것을 잃은 듯 마음의 평정을 잃는다. 그의 마음에 인간에 대한 분노가 그의 분별력과 판단력을 망쳐버렸다. 그리고 결국 사람들이 놓은 덫에 걸린다. 인간에게 잡힌 로보는 계속 살아가야 할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한 듯 인간에게 저항하지 않고 그냥 죽음을 기다린다. 비록 늑대였지만 삶에 대한 체념이었다.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장엄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로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주저하지 않았다. 빨리 블랑카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는 듯이.

자신을 태운 말이 골짜기의 오솔길을 지나 절벽에 다다라 들판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줄곧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로보의 왕국, 지금은 비록 부하들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오랫동안 로보가 지배한 하나의 왕국이었다.”

 

인간만이 생각을 하고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만이 사랑을 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인간은 굉장히 편협한 생각을 하는 존재인지 모른다.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착각 아닌 착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나 자신, 우리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우리는 세상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조그만 개미의 자기희생이 결코 인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무서운 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하는 오만과 독선이다. 그것이 모든 것을 망친다는 것을 자신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 정태성(한신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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