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중독자의 가족』 / 이하진 지음 ‧ 하주원 해제 / 열린책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건강한 몸뚱아리 하나이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줄줄이 아래로 있는 세 명의 동생을 건사해야 했기에 나 자신을 돌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공부는 고사하고 배곯지 않기 위해 초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기술을 배워 생계를 챙겨야 했다. 누구나 예상하듯이 아버지는 무기력하고 술을 드시면 그나마 없는 살림을 때려 부수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피해 어린 우리를 놔두고 떠나셨다. 정말 죽지 못해 살았던 시절에는 원망도 많았지만, 머리가 조금 크니 어머니의 선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13살에 기계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다행히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어 일을 빠르게 배웠고 나쁘지 않은 공장 어른들의 칭찬과 귀여움을 받으며 지냈다. 기술에 일머리도 좋고, 성격도 밝고 싹싹한 덕분에 30살에는 지방 지점의 공장장이 되었다. 동생들도 고생하는 형을 생각해서인지 사고 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 줬다. 가정은 팽개치고 술만 마시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어쩌면 나와 동생들에게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하루하루가 쉽지 않았지만, 동생들 모두 명문대에 진학하고 형을 잘 따라주니 힘이 되었다.

공장이 안정적으로 돌아갈 무렵 곱고 착한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얻고 소소한 행복도 느끼면서 쉼 없이 달려왔다. 7년 전 공장을 독립하면서 내 사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쌓인 신뢰 위에 거래처들이 지속해 물량을 주고 새로운 시장도 열리면서 사업은 아주 탄탄해졌다. 어엿한 중견 기업이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위치까지 올랐다. 쳐다봐야 할 위보다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훨씬 넓은 자리다. 여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가 있었는지 말한다면 34일 밤을 새워 이야기로 풀어도 끝나지 않는다. 마침내 2023, 나 정석우는 우삼정밀기계를 연 매출 810억이 되게 만들었다.

그 일의 시작은 2023년 여름이었다. 가족 여행 한 번 다녀오자, 하는 마음에 필리핀으로 떠난다. 그러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 후회해도 소용이 없지만 내 인생을 파탄 낸 악마 최무식을 만나지만 않았다면. 그 자식은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을 파놓고 나를 기다렸다. 초반에 연이어 터진 대박은 악마의 미끼였고, 조금만 자제하고 적당히 즐기라는 염려의 말은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가족과 친척들, 핸드폰에 저장된 모든 지인에게 거짓말에 거짓말을 더하면서 도박하기를 10. 수십억의 판돈을 걸던 카지노에서 노숙하며 몇만 원 공원 내기 바둑판을 전전하기에 10년이면 충분했다. 나는 그렇게 평생의 수고와 애씀을 다 날렸다. 남은 것은 신용불량과 파산뿐이다.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그러면 좋겠다.

2032. 나는 도박중독자의 가족으로 10년을 살았다. 도박 중독인 당사자도 어렵지만, 도박중독자의 가족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 잘 모른다. 초점은 언제나 중독자에게 맞춰져 있다. 그러나 중독자가 10명이면 그 가족은 최소 40명이다. 가족이라 냉정하지도 단호하지 못하고 공동 의존증을 앓으며 결국 함께 침몰한다. 침몰하는 배에서 사람을 구하려면 내가 먼저 탈출해야 한다. ‘너는 너의 삶, 나는 나의 삶이라는 심리적 거리를 두어야 한다. 말은 쉽지만 쉬운 일이 절대 아니다. 그래도 중독자를 돕는 게 그 가족이 사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도박중독자의 가족 표지
도박중독자의 가족 표지

 

드라마 카지노에서 호구였던 정석우를 가지고 이야기를 꾸며봤다. 카지노를 정주행하지는 않았지만, 요약된 내용을 보면서 궁금했다. 드라마 배경이 온통 도박장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자극적 이야기지만 도박자체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다른 등장인물보다도 소위 호구로 등장하는 정석우. 실제 이런 일들이 적지 않을 텐데 싶어 개인적으로 정석우 가족은 어떨지 궁금했다. 가족의 이야기는 어디서도 쉽게 들을 수 없다. 도박뿐 아니라 여러 중독이 사회적 문제인데 어떻게 도와줄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하진 작가의 만화 『도박중독자의 가족』을 통해 생생하게 듣게 됐다. 어려운 이야기를 용기 내서 그려준 작가에게 고마움이 느껴진다. 중독자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이제 내 길을 다시 가야겠어라는 용기와 응원의 큰 힘이 되리라 본다.

 

남태일 (언덕위광장 광장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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