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회장 정인조)619()부터 23()까지 45일의 일정으로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을 다녀왔다. 이번 탐방은 자문위원들의 평화통일에 대한 역량을 높이고 평화통일을 이루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진행되었다. 평화를 유지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남북한 관계뿐만 아니라 한반도 주변 강대국의 역학관계, 분단과 대결로 이어지는 역사의 이해와 깊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인조 회장은 민주평통 20기가 출범한 20219월부터 지금까지 100여 년 전 일제의 한반도 침탈과 국권 상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선조들의 항일 독립운동, 해방과 강대국에 의한 남북분단, 전쟁과 대결, 대화와 협력 그리고 평화를 위한 노력, 북측에서 남측으로 넘어와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북한이탈주민과의 관계 증진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다.

이번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은 작년 88일부터 12일까지 5일간 부천역 마루광장에서 진행하였던 <봉오동청산리대첩 102주년 기념 특별전시회>의 연장선에 있으며, 탐방의 해설은 북간도 항일운동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발굴해온 김재홍 전 함북지사께서 맡아주셨다.

 

백두산 천지
백두산 천지

 

첫째 날(19), 연길 도착과 이도백하 이동

연길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 도시로 한글 간판이 익숙할 정도로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우리의 문화가 잘 남아있다. 도착하자마자 점심으로 연길냉면을 먹은 후 숙소인 이도백하로 이동했다. 고속도로에서 바라본 이도백하의 풍경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넓은 들판이 수백km에 걸쳐 펼쳐져 있었으며, 논보다 밭이 많고 대부분 옥수수가 심겨 있었다.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백두산 천지에서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백두산 천지에서

 

둘째 날(20), 백두산 천지 등반, 대종사 3종사의 묘 참배, 청산리대첩 어랑촌 답사

이른 아침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 천지 탐방에 나섰다. 요즘 중국인들에게도 백두산의 인기가 높아져 방문객들이 급증하고 있으며 이에 반해 백두산을 방문하는 절차는 복잡해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선 1712년 숙종 때 청()과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움으로써 우리의 영토였던 이곳은 1909년 일제가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기 위해 청나라에 넘김으로써 잃어버린 고토가 되었다. 천지 날씨는 수시로 변해서 불과 1~2분 사이에도 풍경이 바뀌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천지를 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같은 탐방단임에도 불구하고 천지를 본 풍경은 제각각이었다.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백두산 천지에서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백두산 천지에서

 

장백폭포를 보고 내려와 늦은 점심을 먹은 후, 화룡시에 있는 대종사 3종사의 묘를 참배했다. 3종사의 묘는 옥수수밭 한가운데 있었으며, 마을 주민들이 소와 말을 풀어놓고 길러서 그런지 묘역 내에 짐승들의 배설물이 널려 있었다. 북간도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셨건만 묘역 관리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 마음이 무거웠다.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 - 삼종사의 묘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 - 삼종사의 묘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삼종사의 묘에서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삼종사의 묘에서

 

북간도에서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 세력은 종교인들이었다. 특히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는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후에 청산리대첩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대종교 대종사인 나철, 2대 교주였던 김교헌 세 사람은 모두 대종교의 지도부였다. 19201021일부터 26일까지 10여 차례 걸쳐 이루어진 청산리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은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는데 무엇보다 어랑촌 한인들의 협력이 결정적이었다.청산리 전투는 북로, 서로군정서와 여섯 독립군단체가 연합한 홍범도 연합군이 56일의 전투에서 승리한 독립전쟁이다.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어랑촌 항일유격근거지에서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어랑촌 항일유격근거지에서

 

셋째 날(21), 가슴 뛰는 3국의 국경선을 마주하다

연길에서 고속도로로 2시간 반을 달려 중국 동쪽 영토의 끝이자 북한, 러시아, 중국이 국경을 접하고 있는 방천에 도착했다. 전망대에 오르니 동쪽으로는 우리가 고대하는 북한의 두만강역과 두만강 철교가, 북쪽으로는 러시아의 하산역과 동북쪽으로 멀리 연해주의 평야가 보였다.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방천에서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방천에서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방천에서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방천에서

 

오후에는 훈춘시에서 점심을 먹고 도문시의 수남촌으로 향했다. 수남촌은 봉오동전투가 이루어진 역사적 현장이다. 지금은 저수지가 만들어져 더 들어갈 수 없지만, 골짜기를 따라 3~4시간을 올라가면 봉오동 전투지를 만날 수 있다. 봉오동전투의 시작은 두만강을 두고 마주한 북한의 강양동과 도문의 삼둔자이다. 우리 독립군이 강양동에 있는 일본군 초소를 급습하자 일본군이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로 쳐들어왔으며, 이에 독립군은 봉오동으로 일본군을 유인하여 크게 격퇴시켰다.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봉오동 전투 유적지에서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봉오동 전투 유적지에서

 

넷째 날(22), 명동촌(明東村)과 용정(龍井)

명동촌은 18992, 함경도 회령 출신 김약연 선생을 비롯해 다섯 가문이 공동으로 만든 이상 공동체 마을이다. 명동촌은 연길에서 차로 40~50분 거리에 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로 용정에서는 20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마을 입구에 우뚝 솟은 선바위는 지난날 우리 한인들의 불굴의 의지와 높은 뜻을 나타낸 듯했다. 우리 탐방단은 먼저 김약연 선생의 묘소를 참배했다. 선생의 묘역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는데 6촌 친척이 남아 있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묘소에서는 명동촌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분지를 형성하며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육도하를 보니 그 당시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정착한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규암재를 시작으로 명동학교 옛터에 자리잡은 기념관, 송몽규 지사의 생가, 민족시인 윤동주 시인의 생가와 기념관, 명동교회 등 교과서나 책에서만 보고 들었던 우리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명동촌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명동촌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명동촌 선바위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명동촌 선바위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김약연 선생 묘소 참배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김약연 선생 묘소 참배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명동촌 윤동주 생가에서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명동촌 윤동주 생가에서

 

명동촌에서 용정시로 나오는 길에 15만 원 탈취 사건 유적비를 만났다. 191911, 철혈광복단을 조직한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박웅세, 한상호, 김준 지사는 회령에서 용정으로 수송 중이던 길회철도부설자금 15만 원을 탈취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항일투쟁에 필요한 무기 구입을 위한 거사였다. 유적비를 조금 지나니 313의사릉이 나왔다. 19193.1운동이 발발하자 북간도 용정에서도 313, 3만여 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에 나섰는데 일본군과 경찰이 쏜 총에 의해 14명이 사망했다.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15만원 탈취 유적비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15만원 탈취 유적비

 

용정 시내로 들어온 탐방단은 용정중학교로 향했다. 이곳은 원래 민족학교인 대성중학교가 있었던 곳으로 일제는 1938년 용정에 있는 6곳의 중학교를 통폐합하여 용정중학교로 개명하였다. 우리 민족의 힘으로 세우고 민족의식을 고취해 독립군을 양성했던 학교를 강제로 통폐합한 것이다.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용정중학교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용정중학교

 

점심을 먹은 후 용정 지명의 기원이 되는 우물을 찾아가 보았다. 용정은 평안북도 이재민 김언삼, 장인석, 박윤언이 1877년 봄에 터를 잡음으로 시작되었으며 용정은 그들이 사용한 우물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용정 우물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간도 주재 일제 총영사관이 있었는데 지금은 시청으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 한중 관계가 좋지 않은 탓에 사진조차 마음 놓고 찍을 수 없을 정도로 경계가 삼엄했다.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용정에서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용정에서

 

마지막 일정으로 찾은 곳은 비암산에 위치한 일송정이다. 일송정은 용정 시내와 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해란강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전망대로 조두남(친일인명사전 등재)의 행적이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을 때 가곡에 등장하는 선구자를 독립운동가로 오해하기도 했다.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일송정
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 - 일송정

 

다섯째 날(23) 귀국

마지막 날 일정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한 준비와 실행이었다. 124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공항에 2시간 전에 도착해야 했으므로 온전히 귀국하는 데 하루가 걸렸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번 역사 탐방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올해가 조선족자치주 성립 70주년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이곳에도 동북공정의 그늘이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중국 정부의 눈에 보이지 않은 압력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조선족 학교에서도 한국어가 아닌 중국어로 수업을 진행해야 하며, 학생들은 중국 역사만을 배우고 조선족과 한국 역사는 배우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상점 간판들도 현재는 한글을 병기하고 있으나 중국어로만 단일 표기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다고 한다.

세상은 변화하나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똑같다. 누구나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으며, 전쟁과 폭력으로 고귀한 생명이 위협받아서는 안 된다. 이번 북간도 역사 탐방은 나와 사회 그리고 국가를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우리 민주평통 단체의 목적이 바로 민주, 평화, 통일이므로 자문위원들의 활동이 민주평통에서뿐만 아니라 사회단체, 더 나아가 부천에 널리 전해지길 기원해본다.

 

박종선(민주평통 부천시협의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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