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신문 문학기행

장자(莊子)를 거꾸로 읽는 중이다. 앞에서부터 읽기를 시도했다가 몇 번이나 중간에 흐지부지했던 기억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어려운 철학이며 사상은 다 건너뛰고 철저히 우언[재미난 이야기] 위주로만 읽기로 했다.

장자31어부(漁父)에 다음과 같은 우언이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자기 발자국을 싫어하여 그것을 떨쳐내려고 달려 도망친 자가 있었는데, 발을 들어 올리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발자국도 더욱 많아졌고 달리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그림자가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달리기가 아직 더디다고 생각해서, 쉬지 않고 질주하여 마침내는 힘이 다하여 죽고 말았다. 그는 그늘에서 그림자를 쉬게 하고 조용히 멈추어 발자국을 쉬게 할 줄 몰랐으니 어리석음이 또한 심하다.”

그림자를 피하는 방법은 그늘에 들어가서 그림자를 쉬게 하고, 발자국을 따돌리는 방법은 달리기를 멈추는 것뿐인데 어리석은 사람은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해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쉽고 재미난 우언이다. 하지만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뭔가 깊은 뜻이 있는 것 같다.

사람이 한평생을 사는 데 있어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스스로 제 목숨을 재촉하게 만드는 이 그림자라는 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책장을 덮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림자를 쉬게 하는 집, 담양 식영정(息影亭)에 가면 그 뜻을 알 수 있을까 하여 이튿날 새벽 생수병 하나 달랑 들고 집을 나섰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 속 식영정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 속 식영정

 

대중교통 이용해 식영정 가기, 그 험난한 여정

부천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식영정 가는 길을 찾아보니 나름 제일 저렴하고 빠른 방법이, 영등포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장성역까지 간 다음 직행버스로 환승, 운암동정류장에 내려서 경신여고까지 걸어간 후 수완 3번을 타고 교육대에서 하차, 충효 187번으로 갈아타고 가사문학관에 도착하는 코스다.

하지만 여행이란 본시 제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법, 이 저렴하고 빠른(?) 여행 코스는 운암동정류장에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영등포역에서 06:36분 무궁화호를 타고 장성역에 내려서 직행버스를 탄 것까지는 좋았으나 운암동정류장에 내리는 데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안내방송이 나오기는 했는데 알아듣질 못해서 기사 양반께 물으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자리에 앉아 기다리란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아 기다렸더니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광주유스퀘어터미널이다. 어이가 없어서 왜 운암동정류장을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었더니 다들 알아서 내리는데 뭘 그러느냐는 식으로 적반하장이다. 사람이 모르니까 묻지, 알면 왜 묻냐? “, 운암동정류장에서 내리신다고요? 도착하면 알려드릴 테니 안전하게 자리에 앉아 계세요라고 앞으로는 좀 친절하게 고객 응대하길 부탁드린다.

터미널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교육대까지 갔는데 (여기서 저렴한 여행은 끝남) 중간에 광주역을 지날 무렵 나를 더욱 슬프게 하는 기사 아저씨의 한마디. 내가 타고 온 무궁화호 열차는 종착지가 광주역인데 뭐 하러 장성역에서 내려 생고생을 하냐는 것이다. 딴은 옳으신 말씀이다. 모든 게 준비 소홀인 내 잘못이다.

교육대에서 1시간 가까이 기다린 끝에 충효 187번을 타고 가사문학관에 내리니 어느덧 오후 2, 새벽 530분에 집을 나선 후 정확히 8시간 30분 만에 이룬 쾌거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가사문학관은 내부 수리를 이유로 8월 말까지 휴관이란다.

가사문학관
가사문학관
가사문학관
가사문학관
가사문학관
가사문학관

 

식영정에서 혼자 그림자놀이를 즐기다

가사문학관은 휴관이지만, 천만다행으로 가사문학관 옆 음식점은 영업 중이다.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여름철 별미라는 서리태 콩국수를 주문하니 기다렸다는 듯 채 5분도 안 돼 음식이 나온다. 대중교통의 더딤과 콩국수의 빠름이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고나 할까? 맛은 그야말로 천하 별미 중의 별미다.

식사를 마친 후 가사문학관 오른쪽에 자리 잡은 식영정(대한민국 명승 제57)에 오르니 사진으로만 보았던 아름드리 소나무가 흡사 용이 승천하는 듯,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 그 기상이 범상치 않다. 정자는 멀리 무등산 서석대를 바라보며 남서쪽으로 약 30방향을 틀고 앉았는데, 식영정 주인 임억령을 비롯하여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 이른바 식영정 사선(四仙)이 이곳에서 노닐 당시에는 정자를 감싸고 흐르는 창계(증암천)에 자미탄(紫薇灘), 노자암(鸕鶿巖), 방초주(芳草洲) 등의 승경이 있어 운치를 더했다고 한다.

 

식영정 서하당
식영정 서하당
서하당 전경
서하당 전경
김성원의 '서하당팔영'
김성원의 '서하당팔영'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1525~1597)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1496~1568)을 위하여 지은 정자로 최초 건립 연도는 1560(명종 15)이다. 이후 쇠락했다가 송강 정철의 후손인 정민하가 1723년 무렵에 중건했다. 예로부터 이곳은 창계(증암천) 건너편 언덕에 있는 환벽당, 동북쪽 소쇄원과 함께 일동삼승(一洞三勝)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정자 앞에 나무가 무성하여 시계가 좋지 않고, 또 바로 아래로 자동차 도로가 지나가 경치가 예전만 못한 것도 사실이다. 임억령은 그의 식영정기(息影亭記)창계(蒼溪) 위쪽, 푸른 소나무 아래 한 기슭을 얻어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사방에 기둥을 세우고 가운데는 비워두고 띠로 이엉을 얹고 대나무를 엮어서 울을 만드니 멀리서 보면 꼭 일산(日傘)을 꽂은 신선의 놀잇배 같다.”라고 적고 있다.

그 옛날 사선은 간데없고 해타[작품]만 가득 사방 벽에 걸렸는데, 한껏 멋을 부려 쓴 가은노부의 식영정절구 한 수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이윽고 시를 감상하다가 신발 끈을 풀고 정자에 올라앉아 드문드문한 소나무 사이로 광주호의 드넓은 물결을 보고 있노라니, 서울에서부터 줄곧 나를 따라왔던 그림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놀랍고 신기한 마음에 다시 정자 밖으로 나서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림자가 불쑥 나를 따라붙는다. 정자에 들면 사라지고 정자를 나서면 다시 나타나는 이 그림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석천은 석천대로, 서하당은 서하당대로, 송강은 송강대로 저마다 그림자에 대한 생각이 다를지니 현해당은 현해당대로 제그림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음 목적지인 환벽당으로 향한다.

식영정 노송
식영정 노송
동쪽에서 바라본 식영정
동쪽에서 바라본 식영정
식영정에서 바라본 광주호
식영정에서 바라본 광주호
식영정 편액
식영정 편액
정민하의 시 '식영정'
정민하의 시 '식영정'
석천 임억령 '식영정기'
석천 임억령 '식영정기'

 

사촌 김윤제와 송강 정철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 환벽당

환벽당(環碧堂)은 식영정 맞은편 창계(증암천) 위 야트막한 동산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명승 제107,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호이다. 조선 명종 때 나주목사를 지낸 사촌 김윤제(1501~1572)가 고향으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후학을 양성한 곳으로 김윤제와 송강 정철의 첫 만남에 관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김윤제는 낮잠을 즐기다 환벽당 아래쪽 계곡 청계천 용소에서 용이 노니는 꿈을 꾼다. 잠에서 깬 김윤제는 상서로운 기운을 느끼고 용소로 향한다. 용소에서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훗날 조선조 가사문학의 태두 송강 정철이었다.

송강 정철은 27세에 과거 급제할 때까지 10여 년을 이곳에 머무르며 당대의 명망 높은 학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정철이 25세 때 지은 성산별곡에는 조대(釣臺), 백빈주(白蘋洲), 용소(龍沼) 등 당시 환벽당 주변 경관이 잘 묘사되어 있다.

환벽당 툇마루에 걸터앉아 보면 왜 정자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금방 고개가 끄덕여진다. 멀리 무등산 자락으로부터 까치봉, 최고봉, 장군봉 등 사방 산들이 정자를 에워싸고 있는 형국인데, 이를 두고 석천 임억령은 그의 환벽당시에서 만산이 두른 곳에 시내 한 줄기 흐르는 곳, 취하여 난간에 기대니 학의 등이 내려다보이네라고 읊었다. 현재 건물은 1935년에 중건한 것이다.

 

사촌 김윤제의 환벽당
사촌 김윤제의 환벽당
정면에서 본 환벽당
정면에서 본 환벽당
자이(子以) 조상건(趙尙健, 1672∼1721)의 시 '송강 선생의 옛집을 지나면서 감회가 있어 정달부에게 주다(過松江先生舊屋有感志懷仍贈鄭達夫)'(사진 오른쪽)와 석천 임억령의 '환벽당'(왼쪽)
자이(子以) 조상건(趙尙健, 1672∼1721)의 시 '송강 선생의 옛집을 지나면서 감회가 있어 정달부에게 주다(過松江先生舊屋有感志懷仍贈鄭達夫)'(사진 오른쪽)와 석천 임억령의 '환벽당'(왼쪽)
환벽당에서 바라본 환벽.
환벽당에서 바라본 환벽.

 

환벽당을 나와 가사문학로를 따라 화순 방면으로 1쯤 올라가면 대한민국 명승 제40호 소쇄원이 나온다. 소쇄원 주인 양산보(梁山甫, 1503~1557)는 기묘사화 때 스승 조광조의 죽음을 목도한 후 현실정치에 거리를 두고 평소 꿈꿔온 창암촌(지석마을)에 소쇄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정유재란 때 건물이 폐허가 되었으나 손자 양천운(1568~1637)이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쇄원의 조성에는 처가인 환벽당 주인 김윤제와 외가인 면앙정 송순의 도움이 컸다. 소쇄원의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 1755년에 제작된 소쇄원도(瀟灑園圖)가 있다.

소쇄원의 소쇄기운이 맑고 깨끗하다라는 뜻으로 흔히 비 갠 후의 상쾌한 바람과 밝은 달을 일컫는 광풍제월(光風霽月)에 비유된다. 소쇄원에 광풍각과 제월당이 있는 까닭이다.

대봉대, 애양단, 오곡문, 제월당, 광풍각을 차례로 구경하고 위교를 건너 입구 쪽으로 되돌아 나오니 언제 봐도 청정한 대나무숲길 위로 저녁해가 어른거린다.

승객이 하나도 없는 버스 정류장에서 또다시 1시간 남짓 사투를 벌인 끝에 바람처럼 나타난 충효 187번 버스를 타고 보니 얼마나 기쁜지 나도 모르게 기사님을 향해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이번 담양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다름 아닌 기다려라, 그러면 올 것이다이다. 충효 187번은 마을버스 두 대가 운행하므로 짧게는 40분에서 길게는 70분까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꼭 오기는 온다는 뜻이다.

 

소쇄원 대나무숲길
소쇄원 대나무숲길
소쇄원 광풍각
소쇄원 광풍각
소쇄원 오곡문
소쇄원 오곡문
소쇄처사 양산보의 집[소쇄처사양공지려]
소쇄처사 양산보의 집[소쇄처사양공지려]
소쇄원 제월당
소쇄원 제월당
소쇄원 제월당
소쇄원 제월당
제월당에 걸린 송순, 양응정, 기대승의 시
제월당에 걸린 송순, 양응정, 기대승의 시

 

광주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온종일 내 꽁무니에 붙어 다니느라 힘들었을 그림자란 놈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깐족거린다.

주인님, 이렇게 이름 없는 무명 시인으로 한평생을 보내는 게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주인님의 능력이 정말 아깝습니다. 매번 그늘 속으로만 돌지 말고 하루빨리 밝은 세상으로 나가십시오. 제가 힘껏 밀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림자의 그런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갈 내가 아니다. 나는 얼마 전에 정말 하기 싫은 일을 과감히 그만두어버렸으므로 그림자는 지금 한껏 위축된 상태다. 녀석은 어떻게든 욕망이 번득이는 세상으로 나를 내몰아 제힘을 키우려 할 것이다. 그렇게 힘을 키우게 놔두었다가는 어느 순간 녀석의 손아귀에 붙들려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게 뻔하다. 나는 녀석이 잠시 코를 고는 사이 고속도로 휴게소 복권판매대 위에다 녀석을 살짝 뉘어놓고는 부리나케 도망쳐 왔다.

 

현해당(시인, 인문 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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