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성 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항상 내 곁에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다. 나에게서 떠나간 것 중에 돌아오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소중한 것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에서 미래는 내가 생각하고 기대한 것과는 너무나 다를 수 있다.

김애란의 입동은 이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 앞으로도 그 아이와 계속 살게 될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부부에게 어느 날 갑자기 그 아이가 떠나가 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내와 나는 복분자액이 터진 날의 일을 따로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다음날 바로 본가로 내려갔고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나날을 보내려 애썼다. 그러니까 어제와 같은 하루, 아주 긴 하루, 아내 말대로라면 다 엉망이 되어버린하루를,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에게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니 시간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남들이 보내는 시간과는 전혀 다른 그러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소중했던 그 시간이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지금 주어진 시간도, 앞으로 주어질 시간도 그저 흘러가는 무의미의 순간들일 수밖에 없다.

 

살며 생각하며
살며 생각하며

 

지난봄, 우리는 영우를 잃었다. 영우는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그 자리서 숨졌다. 오십이 개월. 봄이랄까 여름이란걸, 가을 또는 겨울이란 걸 다섯 번도 채 보지 못하고였다. 가끔은 열불이 날 만큼 말을 안 듣고 말썽을 피웠지만 딱 그 또래만큼 그랬던, 그런 건 어디서 배웠는지 제 부모를 안을 때 고사리 같은 손으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던, 이제 다시는 안아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는 아이였다. 무슨 수를 쓴들 두 번 다시 야단칠 수도, 먹일 수도, 재울 수도, 달랠 수도, 입 맞출 수도 없는 아이였다. 화장터에서 영우를 보내며 아내는 잘 가라 않고 잘 자라 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양손으로 사진을 매만지며 그랬다.”

떠난 것 중에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있다. 아무리 애타게 기다려도, 아무리 애타게 바라더라도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것이 있다. 삶은 그래서 슬프고도 무겁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고, 나의 영역을 넘어서기에 나의 치열한 노력과 바람도 아무런 의미 없이 공중으로 흩어질 뿐이다.

아내가 끅끅 이상한 소리를 내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영우가 제 이름을 쓰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따금 방바닥이나 스케치북에 그림도 글씨도 아닌 무언가를 구불구불 그려 넣는 건 알았다. 그런데 제대로 앉거나 기지도 못했던 아이가 어느 순간 훌쩍 자라 자랑 이응을 썼다니, 대견해 머리통이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영우의 새까만 머리카락은 또 얼마나 차지고 부드러웠는지.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영우를 다시 안아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중했던 그 순간이 다시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 한 번만이라도 아름다웠던 그 순간을 다시 겪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삶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의 바람도 소원도 외면한 채 삶은 그렇게 끝내버리고 만다.

아내가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봤다. 텅 빈 눈동자가 불 꺼진 형광등처럼 어두웠다. 아내는 한 손으로 영우가 직접 쓴, 아니 쓰다 만 이름을 어루만졌다. 순간 어디선가 영우가 다다다다 뛰어와 두 팔로 내 다리를 감싸 안을 것 같았다. ‘토닥토닥그런 건 어디서 배웠는지, 제 엄마 등을 말없이 두드려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 단순한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다.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부엌 바닥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손에서 벽지를 놓을 수 없어, 그렇다고 놓지 않을 수도 없어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서 있었다. 물먹은 풀이 내 몸에서 나오는 고름처럼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한파가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두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가슴이 시리다. 시리다 못해 너무 추워 견딜 수가 없다. 삶이 때때로 우리에게 주는 그 추위를 우리는 견딜 수가 없다.

단지 방법이 있다면 마음으로 사는 수밖에 없다. 나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붙들고 사는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삶은 우리를 힘들고 쓸쓸하게 만들기에 할 수 있는 그것밖에는 없다.

 

| 정태성(한신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