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지워진 기억』 / 파코 로카 글·그림, 성초림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여행을 다녀온 후 살이 너무 많이 붙었구나 싶었다. 건강을 위해서 몸 관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5년 전 뜻하지 않은 기회가 생겨 지인과 함께 미국 서부 지역을 다닐 기회가 있었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갖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해서 위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1번 해안도로로 내려오는 일정이었다. 빌린 승용차를 번갈아 운전하면서 볼거리를 찾아 곳곳을 살피며 다녔다. 동행한 조카는 그 당시 운전면허가 없어 그 긴 여정을 지인과 내내 둘이 운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긴 운전이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여행이 주는 흥분 덕분이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니 지금보다 젊었다.

매년 여름이 오기 전에 달리기와 식사 조절을 통해 체중을 줄이고 여름을 보낸다. 나는 여름을 무척이나 타는 편이라 몸 관리를 하지 않으면 가을이 오기 전에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해서 여행을 다녀온 2월부터 달리기와 식단 조절을 했다. 한 달쯤 지나서 몸무게는 기대 이상 줄었다. 그런데 몸이 가볍다는 느낌이 평소보다 훨씬 덜 느껴졌다. 각종 건강보조제를 먹으면서 운동하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비문증이 생겼다. 안과 검사를 하고 비문증 원인을 물었는데 의사 선생님 이야기는 병적인 것은 아니고 노화의 과정이라고 한다. 해서 딱히 처방할 약도 없고 대신 심해지면 재검사하자 한다. 병원문을 나서는데 기분이 묘했다. 이유가 노화’, 노화라니. 나도 늙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후 눈 영양제를 아내와 함께 아침마다 챙겨 먹고 있다. 치료도 아닌 노화를 늦출 목적으로 말이다.

6월 중순에는 갑자기 몸이 가렵기에 피부에 뭐가 생겼는지 살폈지만 멀쩡하다. 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가려움이 점점 심해지는 거다. 한번 긁기 시작하면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피부가 긁히고 심지어 피가 맺히기까지 벅벅 긁는다. 안 되겠다 싶어 냉장고 안에 처박혀 있던 연고를 꺼내 발랐더니 어느 정도 진정이 됐다. 이렇게 괜찮아지는 줄 알았는데 얼마 후 다시 증상이 나타나고 이번에는 연고를 발라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결국 동네 가정의학과를 거쳐 피부과에서 약과 연고 처방을 받았다. 병명은 알러지(표준 발음법상알레르기가 맞지만 다들 알러지라 쓴다.) 피검사 결과 특정 알러지는 없지만 알러지 전체 수치가 아주 높단다. 이유는 면역력 저하이고 그 주요인은 역시나 노화에 있단다. 그래 이제 노화는 놀랍지도 않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세상에 약도, 장사도 없다는데 인정하고 수용해야지.

거울을 보니 쌍꺼풀이 진하게 생겼다. 젊을 때는 없었다. 노안으로 인상을 쓰면서 미간에는 내 천()자가 점점 선명해진다. 피부 연고를 바르다 보니 이두박근, 삼두박근 하던 살이 말캉거린다. 살들은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마치 복날 뭐 늘어나듯이 지구 중심 방향으로 축 처진다. 이뿐인가? 아니다. 어제저녁 8시에 어디서, 누구와 무엇 했는지 기억하는데 버퍼링이 꽤 걸린다. 겨우 1년 정도 지났다고 친구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방에 들어와서는 내가 여기 왜 왔지? 한다. 이렇게 깜빡깜빡한다. 이것도 다 늙어가는 증거다.

 

파코 로카 글·그림, 성초림 번역 『주름–지워진 기억』 표지
파코 로카 글·그림, 성초림 번역 『주름–지워진 기억』 표지

 

안 늙을 수 있나? 누구나 늙는다. 태어난 순간 늙는다. 그런데 그런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솔직히 나는 죽는 것보다 늙어가는 게 훨씬 더 두렵다. 특히 기억이 흐려지면서 늙는 것이 무섭다. 늙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노랫말도 있다. 늙어감을 긍정하는 품격 높은 말도 적잖지만, 늙어가는 나에게 위로가 안 된다. 어쩌면 여전히 젊어서(아니면 어려서인가?)일지도 모르겠다.

스페인 그래픽 노블 작가 파코 로카(Paco Roca)주름-지워진 기억은 늙어가는 사람, 특히 알츠하이머와 함께 늙어가는 노년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성실하게 살면서 이제 인생의 종점을 눈앞에 둔 노인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 작품에는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먼저는 위로다. 늙어감을 애써 칭찬하지 않는다. 긍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월의 지혜나 가르침, 명언이 없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그 어떤 흔한 감동도 없다. 작가는 기억이 지워진다는 기억조차 지워지는 날들을 그냥담아낸다. 그냥 담아내니 오히려 강렬하게 늙어감이라는 우리의 실존과 마주하며 질문하게 된다. 나는 어떻게 늙어가야 하지? 모르겠다. 어설퍼도 지금, 기억할 수 있는 지금, 아낌없이 사랑하며 사는 길 외에 뭐가 있을까?

 

남태일(언덕위광장 광장지기)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