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살아가렵니다

요즘 들어 글쓰기에 푹 빠진 남자가 있다. 그는 틈나는 대로 페이스북 계정에 유년기부터 장년기까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빼곡히 적어 올리는데, 50대 초반의 나이면 기억력이 다소 쇠퇴할 만도 하건만, 살았던 동네와 집, 학교와 친구와 선생님, 그리고 적어도 열 번은 더 옮겼을 것 같은 다양한 직장과 동료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남자의 이름은 공창덕이다. 그런 창덕 씨와 내가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창덕 씨의 글들을 대부분 다 읽었고, 그가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는 것과 부천 토박이고 북초등학교와 동중학교를 졸업했으며,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고 곧장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굉장히 낙천적일 뿐만 아니라 도전정신이 강하고 누구보다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녔다는 것도.

어느 날 내가 창덕 씨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창덕 님, 막걸리 한잔하실래요?” 그러자 곧 다음과 같은 답장이 왔다. “제가 막걸리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아랫글은 그날 창덕 씨와 내가 시청 앞 먹자골목에 있는 어느 막걸릿집에서 나눈 대화이다.

 

공창덕 더불어민주당 전국장애인위원회의 운영위원
공창덕 더불어민주당 전국장애인위원회의 운영위원

 

#안녕하세요. 그동안 페이스북에서만 뵙다가 이렇게 직접 만나 뵈니 더 반갑습니다. 먼저 콩나물신문 독자 여러분께 간단한 자기소개와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1971년 당시의 부천군에서 태어나고 부천시에서 성장하여, 현재도 부천시 소사본동에서 사는 부천 토박이공창덕이라고 합니다. 가족으로는 사랑하는 아내와 충남 보령시에서 살고 계신 어머니, 그리고 결혼해서 한 가정의 가장인 남동생이 있습니다.

물류 분야에 30년 가까이 종사하고 있으며 지금은 () 우체국물류지원단이라는 우편물을 수배송하는 공공기관에서 17년째 중·대형 우편차량을 운행하는 기술급 운전직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2020년부터 직장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는 더불어민주당 전국장애인위원회의 운영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전국장애인위원회 발대식에서 고민정 의원과 함께
더불어민주당 전국장애인위원회 발대식에서 고민정 의원과 함께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태어났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창덕 님이 있기까지의 노력을 소개해 주세요.

아버지께서는 버스 운전을 하셨는데 큰아들이 장애가 있다 보니,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했지만,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이것저것 많은 시도를 하셨습니다. 가장의 입장에서 많은 고민과 좌절을 겪으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 가장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아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다양한 한약을 썼다고 합니다. 제가 세 살에서 네 살로 넘어갈 무렵이었을 겁니다. 한의사가 약을 건네면서 이 약마저 듣지 않으면, 평생 걷지 못할 확률이 높다고 했답니다. 신기하게도 그 약을 복용하고 얼마 후에 완전하지는 않아도 벽을 잡고 일어섰습니다.

다섯 살 때까지 시장 같은 곳을 가게 되면 나는 업고 다녔는데 어느 날, 저와 동생이 꽤나 긴 시간 동안 없어져서 걱정하고 있는데, 두 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오더랍니다. 어머니께서 이때 ! 이 녀석이 제대로 걷기 시작했구나.”하는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동생은 장애가 있는 형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며 자랐습니다. 제 말이 어눌하여 때로는 같이 다니며 저의 통역사 역할을 하기도 하였지요. 형이 밉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며 어린 나이에 심리적으로 많은 혼란을 겪으며 성장했을 겁니다. 평생 미안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첫걸음마 사진
첫걸음마 사진
초등학교 1학년 때 운동회에서 어머니와 함께(뒤쪽에서 응원하시는 분이 아버지)
초등학교 1학년 때 운동회에서 어머니와 함께(뒤쪽에서 응원하시는 분이 아버지)

 

#학창 시절부터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며 오늘날까지도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현재까지 꾸준히 연락하고 기억하는 친구들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의 친구들입니다. 모두들 좋은 친구여서 대답하기 조금 곤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꼽으라고 하면 신명석 친구와 고재광 친구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만난 명석이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삶의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멘토같은 친구입니다. 2011, 제가 회사에서 대형 사고로 징계를 받는 등 사고 처리를 할 때, 명석이는 자신의 주머니 사정도 어려우면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2018, 제가 마음의 상처로 대단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도 곁에서 함께 있어 주어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명석이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무조건 네 편이다.”

재광이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만나서 회사도 같이 다닌 적이 있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입니다. 40대 초반이 되어 3년 정도 재광이와 연락을 끊고 지낸 시절이 있었지요. 제가 가끔 연락을 취해도 재광이가 거부를 했습니다. 재광이는 나와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오랜 시간 많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재광이가 돌아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습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어머니께서 양쪽 무릎에 인공관절 수술을 해서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병문안을 겸하여 재광이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잃을 뻔한 좋은 친구를 오랜 기다림 끝에, 더욱 끈끈하고 두터워진 우정(友情)으로 되찾았지요. 재광이는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내가 먼저 저세상으로 가거든 자네가 나를 거둬다오.”

 

대학 졸업식장에서 신명석, 고재광 친구와 함께
대학 졸업식장에서 신명석, 고재광 친구와 함께

 

#중학교를 마친 후에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곧바로 공장 생활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거 같은데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1985년 중학교 2학년 시작과 함께, 그동안 폐암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 혼자서 두 아들을 키울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저는 서울시 이문동에 살고 있는 큰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큰집에 가던 날, 어른들끼리 나누는 대화 속에서 고등학교 진학의 어려움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3학년 진학 시즌에 저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는데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서 부르시더니 포철공고와 금오공고에 지원하기를 제안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학 포기 의사를 재차 말씀드렸습니다. 하루빨리 돈을 벌어서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안 계신 집안 상황에서의 장남의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결정은 지금까지도 제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로 남아 있습니다.

겨울방학이 되어서 무작정 큰집을 나오기로 결정하고, 책가방에 책 대신 옷가지 몇 벌 챙겨서,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이용하여 전철에 몸을 실었고 도착한 곳이 안양역이었죠. 길거리에서 방황하다가 1월 중순쯤 되어서 어느 교회 전도사님의 소개로 군포시에 있는 봉제공장에 취업하게 되었습니다.

 

부천동중학교 후배 멘토링 행사에서
부천동중학교 후배 멘토링 행사에서

 

#어린 나이에, 성치 않은 몸으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늘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비결이 뭘까요?

위에서 밝힌 것처럼 저는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세상에 나와서, 네 살이 되어갈 무렵에야 첫걸음을 뗐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지만, 세 살짜리 꼬맹이 또한 누구보다 절실한 마음으로 걷고자 했을 겁니다.

학교 다닐 때 어떤 아이들은 제 말 더듬을 흉내 내기도 하고, “어벙이” “비실이라고 부르며 때리는 아이들도 있었죠. 복수하고 싶은데 몸이 마음같이 따라주질 않아서 속으로 분()을 삭이며 눈물을 흘리기도 많이 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생각의 크기가 커지며 차츰 승부욕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제가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네 주제에 무슨”, “이눔아, 어디 가서 밥이나 제대로 먹고 살겠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좌절하지 않고, 남들보다 잘되기보다는 남들만큼만 되자는 생각으로 자기 계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노력한 만큼 사회적인 위치가 바뀌었고, 그에 따른 성취감을 맛보았습니다.

 

군복무를 마친 후 부천시 내동에 위치한 “한선산업”에서 근무하던 시절, 동료들과 함께
군복무를 마친 후 부천시 내동에 위치한 “한선산업”에서 근무하던 시절, 동료들과 함께

 

#늦깎이로 방송통신대에 입학 경영학을 전공하고, 인천대학교 동북아물류대학원에 진학하여 물류시스템공학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셨습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처음 목표였던 공무원을 포기한 대가(代價)로 얻어낸 물류관리사라는 직업은 또 다른 목표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1회 공인물류관리사 시험에 합격하고 30명의 합격자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저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졸자였습니다.

1998년 봄에 5명의 물류관리사와 함께 회사를 창업하여, 넓은 세상과 부딪쳐 보니 대학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더욱 커졌고, 결국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영학과에 99학번으로 입학, 4년 만에 학업을 마쳤습니다.

20058월에는, 인천대학교 물류대학원에 입학하여 물류전략 설계에 영향을 미치는 요구특성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완성하며 물류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비록 연구원이라는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지금은 높은 단계의 학문을 무사히 마친 것만으로도 대단히 만족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남들과 비교하며 뒤에서 따라가는 삶을 살아왔었습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힘든 삶이었고, 그러다 보니 행복이라는 단어에 대해 항상 부정적이었습니다.

대학원 졸업을 계기로 제 삶의 자세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으며,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진정 나를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서, 자존감이 높아지고 매사에 감사함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물류관리사”로 물류분야에서 27년 째 일하고 있는 공창덕 위원의 젊은 시절 모습
물류관리사”로 물류분야에서 27년 째 일하고 있는 공창덕 위원의 젊은 시절 모습

 

#사랑하는 아내와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 자주 페이스북에 올라옵니다. 부인 자랑 좀 해주세요,

아내는 고등학교 시절에 겪은 뇌졸중으로 오른쪽 팔다리가 불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밝은 성품으로 본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최대한 혼자서 하려고 하는 사람이지요. 마음이 편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개그맨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머 감각도 탁월합니다. 아내와 함께하는 취미 생활 중 하나가 등산입니다. 함께 산행한 곳 중에서 2015년 도봉산 우이암에 올랐을 때와 2022년 설악산의 금강굴에 올랐을 때의 희열을 만끽하는 아내의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결혼 전에는 동네에 있는 산에만 다녔었지요. 그러나 도봉산 우이암은 어느 산의 정상 봉우리에 처음으로 올랐다는 마음에 감격했었고, 설악산 금강굴은 도봉산을 넘어선 더욱 크고 넓고 높은 산에 올라서 웅장하고 멋진 풍경을 처음 접하며, 스스로의 대단함을 고취하는 산행이었기 때문입니다. 금강굴을 내려오면서 다음에는 울산바위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다짐을 하였답니다.

 

아내와 함께 설악산 금강굴 정상에서
아내와 함께 설악산 금강굴 정상에서

 

#어느덧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늘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시길 빌며 직장 생활을 마친 후에는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직업상담사와 같은 자격을 취득하여 취업을 포함하여 미래를 고민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일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모교인 부천동중학교의 후배들을 위한 일도 꾸준히 해 나갈 계획입니다.

무엇보다도 은퇴 후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공공성을 갖고 소외된 이웃을 위한 활동에도 노력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이종헌(콩나물신문 편집위원장)

 

온유 이주희 글씨/그림
온유 이주희 글씨/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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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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