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병실은 비좁았다. 큰길가라 차 소리까지 왕왕거려 교통사고로 부딪힌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댔다. 먼저 들어온 그녀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알고 지내는 주변 사람들과 달랐다. 첫 대면이 특히 그랬다. 한번이라도 웃어본 적이 있을까싶게 뚝뚝한 표정이다. 나를 위아래로 훑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길게 붙인 속눈썹에 까무잡잡한 피부, 거기다 새빨갛게 바른 입술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말할 때마다 내는 콧소리는 거래처 사장님이라는 남자가 오면 더 심해졌다.

남자가 들어오면 여자는 가림막을 빙 둘러쳤다. 가려진 커튼 뒤에서 여자가 까르르 웃기도 하고 어리광을 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잦아들고 옷깃을 스치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낯 부끄러운 장면을 상상하며 귀를 쫑긋댔다. 주사기를 꽂은 환자가 할 짓은 아니었다. 차라리 병실을 옮겨 달라 할까. 그러면서도 좁은 침상에서 밤을 새우며 죽고 못사는 둘 사이가 궁금했다. 남자는 매번 동이 트기 전 병실을 나섰다.

 

사진 출처(픽사베이)
사진 출처(픽사베이)

 

남자가 간 다음 날 아침 그녀가 다가왔다.

어젯밤 잘 잤어요?”

날선 눈초리가 풀리고 입술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 있다.

당신 같으면 잠이 왔겠어요?’라는 말을 속으로 꿀꺽 삼켰다. 이 나이에 남녀 간의 사랑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나도 때로는 영화 같은 사랑을 꿈꾸었다. 가정 있는 여자에게는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일 뿐, 그렇다고 남의 사랑 놀음이 부러워 잠을 못 이룬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나는 불륜현장을 지켜보는 목격자가 된 것 같아 꺼림칙했다. 그러면서도 내 안에 들이지 못했던 외간남자들을 떠올리며 살짝 설레기도 했다.

실은 그 남자랑 차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났어요. 오빠와는 거래처 사장님으로 알고 지냈는데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지요. 나이도 열두 살이나 차이 나거든요."

어쩐지 수상하더라니. 내 또래는 되어 뵈는데 오빠라는 말이 저리 쉽게 나올까. 여자는 말을 끊더니 핸드폰을 내 눈 앞에 들이댔다.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그녀와 훤칠한 남자가 머리를 맞대고 활짝 웃고 있다. 어젯밤에 다녀간 남자가 아니다.

떠난 남편을 어떻게 잊겠어요. 아들 둘을 낳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요.”

여자는 묻지도 않은 제 사연을 술술 풀어냈다. 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자의 고단한 세월 속으로 덩달아 딸려 들어갔다. 여자는 그때를 회상하는지 눈빛이 아득해지더니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오죽 힘들었으면 아이들을 두고 세상 떠날 생각을 다 했을까. 힘들 때 손 내밀어준 사람이 어젯밤 그 남자였다고.

여자는 자상한 오빠 얘기로 화제를 바꾸더니 얼굴이 발그레 상기되고 눈이 반짝거렸다. 죽은 그녀의 남편이 오히려 외간 남자가 된 것 같았다. 한 사랑이 가고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면 저런 설렘이 이는 걸까. 사람에게 사랑의 감정은 몇 갈래로 나뉘는 것일까. 사랑은 늘 공기처럼 떠돌다 상처 입은 가슴에 내려앉아 또다시 돋아나는가보다.

그녀는 저만의 비밀을 털어놓고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다. 살짝 짓는 미소와 에두르지 않는 말씨가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내 안에 숨어있던 마성이 꿈틀거렸을까. 새로운 사랑에 빠진 여자가 아름다워 보였다. 그렇다고 꿀이 뚝뚝 떨어지는 둘 사이를 지켜보는 일이 마냥 편치 만은 않았다. 부럽기도 하고 시샘 같기도 한 감정이 갱년기 열기처럼 순식간에 올랐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창밖은 완연한 봄이었다.

 

강향숙(수필가)

2013<수필과 비평>등단

하우고개수필동인. 부천작가회 수필분과 회장.

수필집 피어라 동백

강향숙 수필가
강향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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