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김장하는 날 세 여자가 모였다. 그중 가장 젊은 20대 여자는 새댁이었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탔다. 남매를 가진 40대 여자는 나서기 좋아했다. 상대방 말이 끝나기 전, 자기주장이 자동판매기처럼 툭툭 떨어져 나온다. 60대 초반 여자도 있는데 그녀는 외향적이다. 머슴처럼 일하면서 속으로 젊은 그녀들을 부러워했다.

외향적인 여자가 삶은 고구마와 커피를 내놓았다. 먼저 고구마를 먹기 시작한 40대 여자가 어려워서 선뜻 다가오지 못하는 새댁에게 같이 먹자고 권했다. 새댁이 다가와 고구마를 집으며 결혼 전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살며시 내놓았다.

, 얼마나 바보 같은지 그 남자 앞에서 밥도 못 먹었어요.”

연애할 때 남자가 밥 먹자고 하면 자기는 늘 먹었다고 했기 때문에,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한 남자가 빵을 사서 길에서 먹은 적도 있다고 했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40대 여자도 남편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 남편은 얼마나 소심한지, 집도 내가 사고 이삿날도 주소 가지고 퇴근했어요.”

그 말에 이어서 외향적인 여자도 한마디 했다.

우리 남편은 언젠가 내가 뭐라고 했더니 섭섭한지 울더라.”

김장은 외향적인 여자가 주도적으로 했다. 40대 여자는 그래도 눈치껏 돕는데, 자기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안 20대 여자가 말했다.

김장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요.”

김장은 고사하고 김치 한 번 못 담가 본 그녀, 남편이 시어머니 김치만 고집하기에 시장에서 사 온 김치를 시댁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둘러댔더니 남편은 역시 맛있다며 감탄했다고 했다.

40대 여자도 김치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처음 김치 담글 때 조개젓을 넣었던 기억이 나요.”

김치를 맛있게 담가 보려고 새우젓 대신 그녀가 좋아하는 조개젓을 넣었다는 것이다.

20대 여자가 젓가락으로 겉절이를 하나 집어 먹는다. 오동통한 손이 눈에 띈다. 나서기 좋아하는 40대 여자는 손으로 먹는데, 매니큐어 바른 그녀의 손톱 사이에 붉은 양념이 들어가 있다.

두 여자는 고무장갑도 안 끼고 김치 속을 넣는 외향적인 여자의 손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 눈빛에는 맵지 않으냐는 질문이 들어있다. 그동안 자기 손이 맵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외향적인 여자는 두 여자의 눈빛을 보고 그제야 자기 손이 매운 고춧가루에 무감각해진 것을 알아챈 것 같다. 그녀는 젊어서 처음 김치를 담갔을 적엔 자기 손도 매웠다며 몇 가지 고생담을 이야기해 주었다.

남아메리카의 갈라파고스에 사는 핀치새는 어느 곳에 서식하는지에 따라 부리 모양이 달라진다고 한다. 나무가 많은 곳에 서식하는 핀치새는 단단한 씨앗 껍질을 부수기 위해 부리가 두꺼워졌고, 바위가 많은 곳에 사는 핀치새는 바위 속 벌레를 잡아먹기 위해 길고 가는 부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손도 시간이 지나면서 고춧가루에 적응하게 된 모양이다. 언젠가 티브이에서 기름에 볶는 음식을 맨손으로 휘휘 젓는 모습을 보고 놀랐는데 적응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새댁은 벽시계를 자주 바라본다. 40대 여자는 그녀가 들고 온 커다란 플라스틱 통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김치가 맛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결국 새댁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약속이 있다고 일어섰다. 자기 집에는 김치 있으니 안 줘도 된다고 말했지만, 외향적인 여자는 손에 들기 좋을 만큼 싸서 억지로 챙겨 줬다.

나서기 좋아하는 여자는 어떻게든 김치를 많이 가져가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처럼 담근 김치를 플라스틱 통에 꾹꾹 눌러 담는다. 외향적인 여자는 김치 속이 많이 남았다며 일에 중독이 된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절임 배추를 한 박스 더 시킨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사진출처(픽사베이)

 

멸치 액젓 묻은 하루가 서산으로 빠져나가는 어둑한 저녁,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혼자 김장한 외향적인 여자는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 그녀는 20대로 돌아가 본다. 결혼, 출산, 육아 등등을 다시 하려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자 이제는 불쑥 자라난 두 아이를 키우는, 나서기 좋아하는 40대가 부러워졌다. 그래서 외향적인 여자는 이번엔 40대로 돌아가 본다. 아들 사춘기, 사교육비, 아이들 장래 걱정, 특히 아들 사춘기 때는 경찰차가 지나가면 우리 아이가 혹시 저 차에 타지 않았나 하는 두려움이 일어나곤 했다. 그런저런 일을 돌이켜보니 40대 또한 살얼음판에 서 있는 나이라 지친다.

아이들도 다 컸겠다. 홀가분해진 외향적인 여자, 현재 자신의 나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화장대에 붙은 낡은 거울을 보고 눈을 치켜뜨며 어깨를 으쓱해 본다.

 

임수임(수필가)

 

임수임 수필가
임수임 수필가

 

임수임 프로필

2004문학 21시 부문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동인지-수수밭길을 걸으며, 유칼립투스, 폴라리스를 찾아서, 산문로 7번가

rchi851@naver.com

 

 
작가 노트

아가씨 소리 듣고 싶어서 꽃집을 차렸는데 내 손은 점점 나무꾼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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