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부천군 역사, 서른 다섯 번째 이야기

일제는 19395월 중일전쟁 3주년을 맞이하여 내선일체를 강화하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각오를 다지기 위해 4천 원 상당의 예산으로 소사신사(심곡본동 555-76)에서 봉고제를 진행하였습니다.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주입하기 위한 행사였는데 이러한 행사에는 많은 예산이 소요되기 마련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넘어와 살았던 일본인 외에도 우리 선조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기부를 한 사람들의 명단을 <부천에 존재한 일제 적극 조력자들(2022813일 기사)>이라는 이름으로 공개한 바 있는데 이번에는 기부한 사람들은 어떠한 직책을 가지고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 인물이 소림간삼(小林幹三)입니다.

소림간삼(小林幹三)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아버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일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소림간삼의 아버지는 소림등우위문(小林藤右衛門)으로 1869년생 1223일 일본의 나량현(奈良縣) 우지군(宇智郡) 목야촌(牧野村) 대자대택(大字大澤)에서 태어났으며 1906년 서울로 건너왔습니다. 서울의 경성부 명치정(京城府 明治町) 1-10에 정착하였으며 금광과 광업을 통해 거부가 되었습니다.

소림등우위문(小林藤右衛門)은 우리나라로 건너오기 전 일본에서 1892년 우지군(宇智郡) 역소(役所)에서 일하다 19025월 사직하고 대판시(大阪市)로 옮겨 전당포를 운영하였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 때는 보충수졸(補充輸卒)로 징집되었으며, 전쟁 중의 공훈으로 훈8(8) 서보장(瑞寶章)을 하사받았습니다. 제대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군회(郡會) 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19063월 서울로 건너와서 납품업 및 신탁업 등을 운영하였습니다. 특히 1908년 황해도 낙산(樂山)의 금광 채굴에 착수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는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08년 일본인상업회의소(日本人商業會議所)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09년에는 경성거류민단(京城居留民團) 의원(議員)에 당선되었습니다. 19196월부터는 인천(仁川)에 중개업을 열어 또 큰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자녀는 총 7명을 두었으며, 그 중 소림간산은 아들 중에는 차남, 남매 중에서는 3번째였습니다. 이외에도 자녀를 더 두었던 것 같은데 이 내용은 1929년 소림등우위문(小林藤右衛門)이 사망함에 따라 조선 신문(1929.7.3.)에 부고문 광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림간삼(小林幹三)이 차남이 아닌 3남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도중에 죽은 형제가 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림등우위문(小林藤右衛門)의 조선 신문(1929.7.3.) 부고문
소림등우위문(小林藤右衛門)의 조선 신문(1929.7.3.) 부고문

 

소림간삼(小林幹三)19297월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해 복() 취인점(取引店)을 계승 운영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수완을 물려받아서인지 소림간삼은 다양한 회사의 임원과 중역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상() 또한 받게 됩니다. (조선신문 193015, 매일신보 19311227) 1935년에 이르러서는 경동철도주식회사(京東鐵道株式會社) 상무이사(常務理事)에 올랐으며, 조선취인소(朝鮮取引所) 등권부미두부(證券部米豆部) 거래원, 소림광업주식회사(小林鑛業株式會社) 감사(監査), 용산공작주식회사(龍山工作株式會社) 감사(監査), 경성궤도주식회사(京城軌道株式會社) 감사(監査), 경동철도주식회사(京東鐵道株式會社) 상무이사(常務理事)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소화 7년 조선취인소 개업광고. 맨 끝에 인천부 미두취인눤 소림간삼의 이름이 보인다. 
소화 7년 조선취인소 개업광고. 맨 끝에 인천부 미두취인눤 소림간삼의 이름이 보인다. 

 

소림간삼(小林幹三)이 활동한 대표적인 회사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소화산소주식회사(昭和酸素株式會社)1939613일 설립되었는데 자본금이 18만 원이었습니다. 산소가스 압축가스 및 액화가스의 제조 및 판매, 고압 공기의 제조 판매 및 그 설계, 형석(螢石) 규석(硅石) 기타 중공업용 광물의 채광 및 판매 등을 하였는데 소림간삼(小林幹三)은 이사로 재직하였습니다.

중앙자동차주식회사는 193271일 설립한 회사로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금량장리 127에 본점을 두었으며 자동차에 의한 여객 화물의 운송업 및 투자 및 부대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자본금은 4만 원이었습니다. 소림간삼(小林幹三)은 이사로 재직하였습니다.

금강산소주식회사는 1941123일 설립한 회사로 소림간삼(小林幹三)이 직접 대표로 있는 회사로 경성부 한강통 1정목 82에 본사를 두었으며, 산소가스 압축가스 및 액화가스의 제조 및 판매 등의 사업을 하였습니다.

소림간삼의 활동을 통해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 삼아 수탈한 역사를 이해할 수 있으며, 수탈을 가속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세운 회사들의 내용도 알 수 있었습니다. 소림간삼이 기부하였던 683원이라는 금액 또한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