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탈주민과 함께하는 역사 아카데미’ 2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는 <2023년도 경기도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 지원사업>에 지원하여 지난 8월부터 북한이탈주민과 함께하는 역사 아카데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는 강의를 진행하고 넷째 주 토요일에는 답사를 진행하는 방식인데, 지난 826일 경기도 부천과 김포 답사에 이어 923일에는 서울의 여운형 선생 묘소와 근현대기념관 그리고 고양의 행주산성을 다녀왔습니다. 원래는 양평군의 몽양기념관을 다녀올 계획이었으나 건물 보수공사 휴관으로 서울 강북구에 있는 묘소로 변경하였습니다. 몽양선생 묘소 부근에는 근현대사기념관이 있고, 이준 열사 유해봉환 60주기 추모 특별전 <돌아오지 못한 헤이그 특사>가 있어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이번 답사에도 30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였는데 특히 북측에서 넘어와 생활하는 시민들이 가족 단위로 참여하여 그 의미를 더 깊게 하였습니다.

 

‘몽양 여운형 선생 묘 앞에 선 '북한이탈주민과 함께하는 역사 아카데미’ 답사단 
‘몽양 여운형 선생 묘 앞에 선 '북한이탈주민과 함께하는 역사 아카데미’ 답사단 

 

근현대사기념관의 이준 열사 특별전

주말을 맞이하여 근현대사기념관은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습니다. 학예사들이 총출동하여 해설에 여념이 없었는데, 우리 부천 팀은 장원석 학예사께서 1시간 넘게 이준 열사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이준 열사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어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펼쳤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좌절한 나머지 자결하신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이번 특별전을 통해 이준 열사에 대해 미처 몰랐던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장원석 학예사가 알려준 이준 열사의 업적은 크게 세 가지로 1세대 검사, 애국계몽운동 그리고 헤이그 특사가 그것입니다.

 

장원석 학예사(사진 왼쪽)와 이태호 시루작은도서관 관장
장원석 학예사(사진 왼쪽)와 이태호 시루작은도서관 관장
장원석 학예사의 설명을 경청하는 역사아카데미 답사단
장원석 학예사의 설명을 경청하는 역사아카데미 답사단

 

이준 열사는 1906년 평리원 검사로 임명되고, 19071월 황태자비 관례를 축하하기 위해 공포된 은사령(恩赦令)을 담당하여 사면대상자로,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된 김인식, 나인영, 오기호, 기산도 등을 올렸습니다. 구국 활동을 했던 분들을 사면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친일 법무대신 이하영을 비롯한 법관들은 이를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준 열사를 기소까지 하였습니다. 그 결과 검사직에서 해임된 이준 열사는 법부 형사국장을 기소하고 청원서를 제출하여 법부대신 이하영을 비롯한 법관들을 모두 고소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이준 열사는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 검사로 불리게 되었으며, 동시에 국민적 지지와 고종의 신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법부대신을 고소한 호법신 검사 이준
법부대신을 고소한 호법신 검사 이준

 

이준 열사는 또한 헤이그 특사가 되기 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이준 열사는 일본군 부상병들을 도울 휼병비를 모금하여 일본 적십자사에 전달하자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에 경도되어 러일전쟁을 백인종과 황인종의 대결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중립노선을 견지한 대한제국의 정책에 반한 것이기 때문에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되게 되었습니다.

석방된 후에는 반일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합니다.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맞서 이상설 선생과 함께 보안회(일명 보민회)를 만들어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일제에 의해 해산되자 협동회로 명칭을 바꾸어 반대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여 공진회를 조직하였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상소문과 오적격토문을 작성하여 반대하였습니다. 1906년에는 한북흥학회에 참가하여 국권 회복과 민권 신장을 위한 교육활동을 하였습니다.

 

헤이그 밀사(이상설, 이준, 이위종)
헤이그 밀사(이상설, 이준, 이위종)

 

이준 열사는 1907년 이상설, 이위종선생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늑약은 일제의 강압으로 이루어졌고, 결코 대한제국 황제가 원하는 바가 아님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으나, 강대국 대표들은 한국의 청원에 냉담하기만 했습니다.

이준 열사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음식을 끊었으며 1907714일 돌연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장례는 순국한 지 사흘만인 716일 거행되어 헤이그의 아이큰다우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었으며, 95일 구미 열강 순방 차 다시 찾은 이상설, 이위종 선생에 의해 뉘에크앤다운 시립묘지에 정식으로 안장되었습니다. 이후 이준 열사의 유해는 1963년 국내로 봉환되었으며 현재 서울시 강북구 수유리에 그 묘가 있습니다.

 

이준 열사의 헤이그 묘소 사진
이준 열사의 헤이그 묘소 사진

 

여운형 선생 묘소 참배

여운형 선생은 1886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서 태어났으며, 일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통일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여운형 선생의 뜻을 기리고 잇기 위해 양평군에서는 몽양기념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운형 선생이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시기는 1907년입니다. 1907년 국채를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 양평지회를 맡으셨으며, 1914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18년 신한청년당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선생을 민족대표로 파견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임시정부 수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1929년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출옥한 후에는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맡았으며,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의 전신인 조선올림픽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1944년에는 비밀독립운동 조직인 건국동맹을 결성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로 전화하여 사회 혼란을 막고 새로운 사회를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특히 신탁통치로 좌우가 분열되고 분단될 위기에 처하자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하지만 좌우 세력으로부터 열두 차례에 걸친 테러를 당하였으며, 1947719일 혜화동 교차로에서 우익세력의 총에 맞아 끝내 사망했습니다. 여운형 선생의 일생은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체육인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남북통일정부를 만들기 위한 그 정신은 지금도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행주산성 경내에 있는 권율 장군 동상
행주산성 경내에 있는 권율 장군 동상

 

고양시 행주산성

행주산성은 덕양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토성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대첩, 진주대첩과 더불어 3대 대첩지로 꼽힙니다. 둘레가 1km밖에 되지 않은 작은 성이지만 당시 조선 최고의 무기인 화차’, ‘비격진천뢰’, ‘신기전등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여 총 7차에 걸친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쳤습니다. 관군뿐만 아니라 승병, 의병이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여인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투석전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요즘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을 비롯해 이범석 장군, 이회영 선생, 지청천 장군, 김좌진 장군 등 독립 영웅 5인의 흉상 철거 문제로 인해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이들 독립 영웅의 흉상을 철거한 후에는 친일파이자 독립군을 때려잡던 간도특설대 대원이었던 백선엽의 흉상을 그 자리에 설치하려고 한다니 이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배신하고 적국을 위해 싸우라는 메시지나 다를 바 없습니다. 반드시 저지해서 이 땅에 상식과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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