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Con sentimento  감정을 갖고

피아노를 팔았다. 아니 버렸다는 말이 더 맞다. 거실과 주방 사이,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에도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가 먼저 나를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상처 입고 웅크리고 있는 짐승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저 검고 흰 조각들이 맞물린 가구에 불과했다. 피아노를 돈으로 환산하고 난 후 어쩌면 이토록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돌부리에 자꾸 걸려 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Capriccioso  마음 내키는 대로

피아노가 나에게 왔을 때, 나는 처녀였다. 형식이 없는 자유로운 재즈에 빠져 지내다 혼수로 폼 나게 가져왔지만, 결혼생활은 처녀 때 배운 재즈적인 것과 무관했다. 남편과의 불협화음은 똑같은 마디에서 자꾸 걸렸다. 서로 스타카토처럼 뚝뚝 끊어 감정을 표현했고 크레센도로 들볶았다. 음은 같지만, 라의 플랫과 솔의 샵을 누를 때 마음가짐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젊은 새댁은 몰랐다. 주어진 악보를 읽는 일도 버거웠고 품을 여유도 없었다. 산다는 것이 벙어리장갑을 끼고 건반을 치는 것 같았다.

 

Tranquillo  조용하게 쉿!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불협화음의 세계. 말문이 막히게 다투고 나면 피아노 곁으로 다가갔다. 한밤중이라도 뚜껑을 열면 하얀 이를 드러내놓고 웃는 사람처럼 괜찮아, 괜찮아, 연습하면 다 좋아질 거야.’ 하고 길게 웃어주었다. 그 치아 사이로 격정을 조율했다. 피아노 의자에 앉으면 페달을 밟아 소리부터 죽였다.

큰소리가 이웃집에 들리지 않도록 반쯤 입을 막은 채 건반을 눌렀다. 어느 날 피아노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었다. 그를 사랑한다면 마음이 버티는 한 오래도록 안단테, 안단테. 피아노는 곡을 선택해 칠 때마다 내가 무슨 감정인지 잘 알아채는 사람 같았다. 빠르되 거칠어지지 않게 느리되 처지지 않게.

악상의 작은 마디와 도막들은 다음 마디 연결을 고려하지 않는 마디는 단 하나도 없었다. 양팔은 마치 서로 다른 몸인 양 완전히 독립적이어야 했다. 견고한 시간의 마디를 건너기 위한 연습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반복적으로 자각하는 일이었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사진출처(픽사베이)

 

lacrimoso  애처롭게

피아노를 실어 갈 일행이 도착했다. 그들은 짐승의 눈을 가리듯 검은 천으로 덮어씌우더니 밧줄로 동여매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그리곤 한 사람의 발소리처럼 굴려서 내가 모르는 곳으로 떠나갔다. 멀어져 가버린 피아노. 어쩌다 멀리 던진 공을 잃어버린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머문 자리에 기역자 귀퉁이만 댕그라니 남았다. 피아노는 어제보다 오늘을 잘살고자 애쓸 때 함께했던 친구였다. 그는 분명 따뜻한 햇살을 많이 받으며 자란 나무이지 않았을까. 살면서 모든 것을 보여주고 털어놓아도 좋을 한 사람쯤 있어야 한다지만 나는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좋았다.

 

Affetuoso  애정을 담아

중고 상인 손으로 넘어가기 직전 나는 갑자기 할 말이 생긴 사람처럼, 아니 마지막을 맞대해야 하는 사람처럼 뚜껑을 열어 피아노를 쳤다.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이 곡을 한때 얼마나 되풀이하며 연습했던가. 육중한 제 무게에 늙어가던 몸이 뻑뻑한 소리를 내었다.

누군가를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가끔 공연장 무대에 놓여있는 피아노를 먼발치에서 바라볼 때면 왜 그를 버렸는지, 굳이 그럴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알려고 하지 않고 밀어내버린 사람 같았다. 그렇지만 사람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일까. 공연장 가득 환호와 박수가 터질 때 나는 수백 명에게 기쁨을 주는 무대 피아노가 아닌 단 한 사람, 나를 위로해 주었던 피아노를 떠올리며 힘껏 박수를 쳤다.

사랑했으나 아름답게 보내주지 못한 내 사랑. 잘 가라. 그리고 같이 산다고 다 사랑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 나는 이제 익숙해지는 것을 못 견딜 뿐이야. 나의 이별 방식은 놓아주는 사랑이다.

 

전미란(수필가)

 

전미란 수필가
전미란 수필가

프로필

전남 장흥출생

수필과 비평등단

수필집 이별의 방식(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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