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성 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소설 삼국지에서 유비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되자 책사인 제갈량을 부른다. 그는 아들 유선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다. 유비는 자신의 큰 뜻을 다 이루지 못함을 못내 아쉬워하며 그가 가장 믿었던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을 도와 자신의 뜻을 대신 이루어주길 부탁한다. 제갈량은 주군인 유비의 유지를 끝까지 받들 것임을 유비에게 맹세한다.

유비는 아들 유선을 불러 모든 것을 제갈량과 상의하고 오로지 제갈량의 의견을 따르라 말하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다.

勿以惡小而爲之 勿以善小而不爲(물이악소이위지 물이선소이불위)”. 이는 악이 작다는 이유로 행해서는 안 되며, 선이 작다는 이유로 행하지 않아서도 안된다."라는 뜻이다.

유언이란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최후로 하는 말이다. 그만큼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텐데, 천하를 다스리려던 유비는 왜 이런 유언을 남겼을까?

유비는 모든 것이 아주 지극히 평범한 것에서 시작된다는 자연의 근본적인 원칙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인 유선이 군주가 되어 나라를 다스릴 때 가장 커다란 문제도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을 것임을 예감했다.

유선이 어리석고 부족하여 주위의 누군가에 의해 조그만 나쁜 일, 즉 악행을 시작하게 되면 그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악은 아주 평범한 것에서 시작되었을지 몰라도 잘못하면 나라 전체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군주의 사소한 악행은 그만 바라보는 모든 신하와 백성들의 신뢰를 잃을 것이고 이것이 고쳐지지 않고 계속된다면 유비의 커다란 뜻을 이루기는커녕 힘들게 세웠던 나라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을 유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 철학자이자 지난 세기 최고의 철학자였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제자인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책은 1960년 독일의 나치 친위대 장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을 한나 아렌트가 직접 참관하고 나서 쓴 책이다. 히틀러 직속 부하였던 하인리히 힘러는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 총책임자였다. 그리고 아이히만은 그 역할을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했던 힘러의 부하였다. 그의 당시 계급은 중령이었으며 어찌 보면 그가 수많은 유태인 학살의 실무 책임자였던 것이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히틀러의 가장 최측근 부하이었기에 가장 악한 사람 중의 한 명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우리 주위에 살고 있는 이웃같이 선한 얼굴에 마음씨도 좋아 보이고 말도 온순하게 하는 그런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재판을 보면서 그가 히틀러의 뜻을 받들어 그렇게 많은 유태인을 학살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으로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Otto Adolf Eichmann(사진출처 위키피디아)
Otto Adolf Eichmann(사진출처 위키피디아)

 

히틀러 치하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학살된 유태인만 600만 명이었다. 그런데 그런 학살을 자행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를 보고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란 말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아이히만은 전범재판에 의해 1962년 사형에 처해진다.

유비도 마찬가지로 악의 평범성을 알았던 것이다. 군주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는 악의 평범성이다. 왜 이것이 중요한 것일까?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권력으로 인해 아주 쉽게 자신이 원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만약 그 힘을 이러한 악을 행하는 데 사용하는 순간 그는 인류의 가장 커다란 악의 화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권력이 무서운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이었던 히틀러와 무솔리니, 러시아의 스탈린, 일제강점기 수많은 한국인들을 죽인 히로히토, 임진왜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은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악의 화신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우리와 비슷한 지극히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악마로 변했을 뿐이다.

우리 자신도 잘못하면 서서히 악의 평범성에 물들어 갈 수 있다. 가깝게 보면 오늘 저녁 술 한잔하고 음전운전을 한다면 그도 일종의 악의 평범성에 길들여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사소한 음주운전으로 다른 사람의 고귀한 생명이 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허무하게 이 세상을 떠난 생명은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 음주운전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엔 그러한 평범한 악이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어쩌면 나 자신도 악의 평범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 그 평범한 악을 인식조차 못 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평범한 악에 물들지 말고 평범한 선을 쫓아가야 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 정태성(한신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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