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정웅(神部正雄)을 알면 대일항쟁기 부천군 소사면의 역사를 알 수 있다

1910, 경술국치 전후로 많은 일본인들이 식민지 조선으로 넘어옵니다.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들어온 관료, 군인, 경찰들 뿐만아니라 농업, 상업, 광업, 금융 등 다방면의 사람들이 왔습니다. 말 그대로 식민지 조선 경제를 수탈하고 이 땅을 식량 생산 기지로 만들기 위해 온 것입니다. 일본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거나 성공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들에게 조선은 기회의 땅이 되었습니다. 부천에도 많은 일본인들이 들어왔는데 그 중 부천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일본인 중 한명이 바로 신부정웅입니다. 신부정웅의 이야기를 그의 직업과 활동단체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신부정웅의 나이는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1933년 경기도회 의원으로 출마할 당시 매일신보에 소개된 신부정웅의 프로필에는 그의 나이가 49세로 나옵니다. 1933년을 기준으로 유추해보면 대략 1884년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천과 신부정웅의 인연은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총독부 관보에 그의 이름이 소사공립심상소학교 교장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조선총독부 관보1914,1916,1917)

그러다 1925년에 악덕 고리대업자로 신문에 재등장합니다. 한마디로 신부정웅을 혹평하는 기사인데 교육자 출신임에도 고리대업으로 농민들의 고혈을 빨아서 못살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한번은 신부정웅이 인천 지방법원에 들어가려고하는데 저자가 또 누구를 못살게하려고 오는가?”하는 말이 귀에 들어옴에 따라 양심의 가책을 느껴 고리대업을 그만두었다는 기사도 보입니다.(1925620일 매일신보)

결론적으로 신부정웅은 고리대업을 통해 부()를 많이 쌓았으며 동시에 헐값으로 농민들로부터 농지를 많이 거둬들여 농장주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흡혈귀의 자선사업'이라는 제목의 신부정울 관련 기사
 '흡혈귀의 자선사업'이라는 제목의 신부정울 관련 기사

 

고리대업 문제는 1920년대와 30년대 조선에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농촌에서 고리대업 문제가 얼마나 심하였으면 지주들이 소작농을 구제하는 운동까지 벌이게 됩니다. 고리대업으로 농촌 사람들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상황까지 내몰린 것인데, 농촌의 몰락, 즉 소작농의 몰락은 지주들의 손해로 귀결되 때문에 지주들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난 인간미를 바탕으로 소작농을 구제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위한 잔머리에서 나온 얄팍한 타개책이었던 것입니다. 이 당시 상리(上里), 지금의 상동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기사도 있습니다.

부천군 소사면 상리는 61호에 불과하며 그 대부분은 소작농인 한촌이나 이 마을의 부채는 5천여원의 거액에 달할 뿐아니라 그 대부분은 35리 내지 4푼이란 고리대금임으로 이곳 주민들이 피땀을 흘리고 지은 수확은 거의 채권자에게 빼앗기고 말게 되는 형편임으로.....”(1933116일 매일신보)

신부정웅은 이같은 경제력을 기반으로 1930년대에는 더욱 활발한 사회단체 활동을 합니다.

 

첫 번째, 선출직 공직 도전

1930년 부천군에서 1명 뽑는 경기도의(道議)에 뛰어듭니다. 이 당시에는 경쟁자들이 많았습니다. 이계현(계남면), 강석조(계남면), 김범수(영종면), 박용균(부내면), 송재붕(덕적면), 신부정웅(계남면) 6명이 나왔는데 아깝게 3표차이로 강석조(45)에게 떨어집니다. 3년후인 1933년 신부정웅은 재도전을 합니다. 가장먼저 등록할 정도로 열정을 보이는데 이 때는 31표 받은 송재붕을 6표차로 이기고 당선되었습니다.(1933512일 매일신보)

1935년에는 부천군 소사면 면의에 나가 당선됩니다. 이 당시 면의는 총10명이었는데 전중천태랑, 정윤모, 신부정웅, 약사천관, 이성환, 원인상, 신학용, 길촌등오랑, 박주순, 무야송평이었습니다.(1935525일 매일신보)

 

두 번째, 소사계리() 사장

1936415일 부천군 소사면 심곡리 609에 소사계리를 설립하여 가축자금의 융통, 비료자금의 융통, 상업자금의 융통, 가축과 가축산물매매 및 위탁업, 가축동료의 판매, 농산물의 위탁판매, 시장위탁경영 및 부동산 매매 중개업 등의 사업을 하였습니다.

 

세 번째, 강제동원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조직과 단체 구성

일제는 1931년에 만주사변, 1937년에 중일전쟁, 1941년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이로인해 일제는 부족한 자원과 물자를 채우기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었으며 동시에 인적 강제동원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러한 강제동원 및 병참기지화가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지역에서는 다양한 단체가 만들어졌습니다.

 

1938년 소사면 방공본부

소사면에 방공본부를 설치하고 각리에는 반을 설치하여 방공의 만전을 기하고자 결성식을 진행하였는데 신부정웅은 본부장을 맡았습니다. 이때 황거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을 하였는데 모두 내선일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93871일 매일신보)


정신총동원연맹 결성식

국민정신총동원 부천연맹결성식을 거행하면서 전몰자 영령을 추모하는 동시에 전장병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묵념과 황국신민 서사를 제창하였습니다. 신부정웅은 이사장을 맡았습니다. (1938111일 매일신보)

소사오정방공단 결성식

소사면과 오정면 양면을 통합하여 방공단 결성식성대 거행하였는데 신부정웅은 고문을 맡았습니다.(1939124일 매일신보)

부평명덕회 조직

유교의 친일단체인 부평명덕회 구성시 신부정웅은 고문을 맡았습니다.(1939214일 매일신문)

지원병후원회
일제는 전쟁으로 인해 부족한 병력을 조선인들로 채웠습니다. 각지에서 지원병을 모집하였는데 발회식에서 좌장으로 추천되었습니다.(193945일 매일신보)

일제는 1940년 특별지원병을 선발하였습니다. 대부면의 이승업(李承業), 소래면의 안병희(安炳熙) 그리고 오정면의 박승순(朴承順)이 대표적입니다. 재향군인소사분회장인 스토오사다오의 안내로 이들 지원병들은 소사신사에 참배하고 오후 419분 관민과 학생 천 명의 환송 속에서 경성으로 출발했습니다.(19401215일 조선신보)

장영한 부천군수(8, 1937.11 ~1942.6)1939125일 인천경찰서장과 함께 소사북소학교에 가서 면내 청년단원 50명을 소집하고 그 자리에서 10명의 지원자를 받습니다.

 

지원병 후원회 기사
지원병 후원회 기사
소사신사 참배 기사
소사신사 참배 기사

 

부평수리조합 평의원 선거

부평수리조합은 대표적인 농민 수탈 기관입니다. 한강의 물을 부평평야로 끌어와 농업용수로 사용하는 것인데 수세가 비싸 농민들은 1927년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신부정웅은 1939년 부평수리조합 평의원 선거에 나가 당선되었습니다.(193979일 매일신보)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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