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목뒤로 차가운 물체가 뚝 떨어졌다.

화들짝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손에 쥐고 있던 뽕잎은 어디 가고, 손끝은 서늘한 누에를 주무르고 있다. 누에채반 안에 누에 한 마리, 뽕잎을 찾아 헤매다 졸고 있던 나를 깨웠다.

부모님은 부업으로 누에를 쳤다. 누에치기는 농사와 달리 비교적 짧은 기간에 끝난다. 가을걷이까지 현찰 구경하기가 힘든 농촌이다. 가족 모두 현금 마련을 위해 누에치기에 매달렸다. 이 시기 집안 풍경은 태풍이 휩쓸고 간 뒤끝 같다. 누에 밥인 뽕잎 주기에 지친 식구들 얼굴은 노란 달맞이꽃을 닮아간다. 사람이 누에를 키우는지 누에가 사람을 다루는지 힘겨운 기간이다.

누에들은 입을 오물거리며 뽕잎을 더 달라고 조른다. 십여 명이 넘는 일꾼이 온종일 뽕잎을 따 쌓아놓아도 누에 밥은 항상 부족하다. 뽕잎을 따는 팀, 누에 밥을 주는 팀. 일꾼들은 잠실과 뽕밭을 개미가 줄 서듯 바삐 오간다. 뽕잎 따는 일꾼이 부르는 타령조 노랫소리가 탁하게 변할 때쯤이면 하루해는 슬며시 서쪽으로 숨어든다. 흙벽돌에 초벌 도배만 걸친 기역 자로 지어진 잠방이다. 흙냄새 풍기는 그곳은 인부들의 빠른 손놀림으로 방 안 온도가 뜨겁다. 누에채반은 칸칸이 틀을 잡고 있어 두 손으로 고이 꺼내 뽕잎을 넓게 펴주고는 다시 제자리로 집어넣었다. 어둠이 잠방 안에 시나브로 파고든다.

인제 그만 마무리하세요.”

어머니 목소리는 힘이 없어도 인부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되레 재빨리 손을 털며 등을 보였다. 이제부터 잠방 일은 집안 식구들 몫이다. 잠실 칸칸이 한 사람씩 차고 들어가 윗줄 아랫줄 채반을 꺼내 누에가 안 보이게 뽕잎을 듬뿍듬뿍 올려주었다.

 

뽕잎 먹는 누에(사진출처 픽사베이)
뽕잎 먹는 누에(사진출처 픽사베이)

 

누에가 뽕잎 먹는 소리는 사사 사 삭 비 오는 소리 같기도 하고, 사각사각 사과 베어먹는 소리 같기도 하다. 누에채반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다 보면 반복된 동작에 허리는 끊어지듯 아프지만, 그 아픔보다 더 강렬한 욕구는 쏟아지는 잠을 참는 일이다.

젖빛 피부, 까만 눈, 마디마디 등위에 까만 점을 걸친 누에다. 입을 쉴 새 없이 오물쪼물 잘도 먹는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착한 아기 같다. 누에는 네 차례의 탈피가 있다. 잠을 안 잘 때면 계속 오물대며 먹던 누에 입은 잠을 자기 시작하면 머리를 빳빳하게 곧 추 세우고는 얼음 땡 놀이를 하듯 그대로 멈춘다. 탈피를 완벽하게 잘하는 누에는 다음 단계로 성장하지만 껍질이 몸에 걸린 누에는 그대로 생을 마감한다.

학교가 파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을 도와드렸다. 누에채반 위에 신문을 깔고 켜켜 쌓아놓는 작업이 동생과 나의 몫이다. 읍내에서 사 온 철 지난 신문에는 농촌에서는 들을 수 없는 세상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중 성인 연재소설 이병주의 바람과 구름과 비는 나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했다. 손은 느릿느릿 눈길은 아예 신문에 내리꽂다 보면 어느새 다가온 어머니는 내 등을 힘껏 내리치며 정신 차리라 호통을 치신다.

선아, 내일은 일손이 바쁘니 학교를 하루 빠지거라.”

학교도 가지 말라니 말이 되냐고?”

불끈 누에가 머리를 쳐들듯 댓 거리를 했다. 다른 날 같으면 회초리에 한바탕 푸닥거리까지를 들었을 텐데 어머니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오늘은 누에고치 수매하는 날. 부모님 얼굴에 모처럼 웃음꽃이 피었다. 손수레에 높이 쌓인 고치 자루는 부모님 땀이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새벽 공판장에 간 부모님이 동구 밖 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질 때까지 소식이 없다. 동생들과 목을 빼고 부모님을 기다리다 보면 저 멀리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들아! 어서 나오너라!”

막걸리 한잔이 아버지를 거나하게 이끌었다. 소고기 한 근, 간 고등어 한 손, 모든 것이 행복한 날이다. 평소 과묵한 아버지는 장에서 걸친 술 한잔에 목소리도 우렁차다. 아들, 딸 불러 모아 노래자랑 시작이다. 구름도 울고 넘는 가사로 시작되는 고향 무정이라는 노래는 우리 집 애창곡이다. 실향민이던 아버지가 선창하면 딸들이 입을 맞춰 노래를 불렀다. 노래 끝마무리는 늘 아버지가 부르는 타향살이 노래다. 교사에서, 피난민, 다시 농부로 살아온 힘겨운 당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눈가를 붉히시던 아버지다. 우리는 그날이 행복한 날이다. 밀렸던 월사금과 두둑한 용돈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잠방에서 시작된 어린 날의 고뇌는 누에가 되어 잠방 위에 앉아도 보고 번데기에서 날개 달린 나방이 되어 세상으로 날아가는 꿈을 꾸게 해주었다. 새벽 컴퓨터 자판 소리에 귀 기울여보면 사각사각 뽕잎을 갉아 먹던 누에로 변한 나를 발견한다.

수필집얼음새꽃 피다, 꼬꼬지 심쿵을 내고 다음 수필집을 준비 중이다. 작품집을 출간할 때마다 아쉬운 부분이 많다. 누에들이 허물을 벗을 때 몸을 비틀 듯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용트림을 해본다. 십여 년 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습작을 하고 또 해도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다. 완성을 위한 미완성의 허물은 계속 이어진 습작으로만 벗겨낼 수 있다. ()방의 누에처럼 부모님의 피와 땀이 깃든 정성으로 자라온 우리 형제 팔 남매다. 부모님 살아생전 사랑해요, 고마워요, 한마디 말도 전하지 못했다. 내 어머니 나이가 되어서야 어머니가 흘렸던 눈물의 깊이를 헤아리게 되었다.

열일곱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잠방은 내 인생의 자양분이다. 힘겨운 삶의 현장. 땀으로 얼룩진 노동, 그 뒤에 숨어있던 소소한 행복, 이런 모든 것이 힘들고 지칠 때 견디고 헤쳐 나갈 내 힘의 원동력이 되었다. 다시 또 나방이 되어 날아오를 날을 기다린다. 누에가 되어 잠방에 동그마니 누워있는 나를 내려 다 본다.

 

최명선(수필가)

최명선 수필가
최명선 수필가

 

최명선 수필가 프로필

한국수필등단,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수필 이사, 전영택 문학상 수상, 부천문협 회원, 부천여성문학 회원, 부천수필 회원, 부천현대백화점 수필 강사역임

저서 얼음새꽃 피다, 꼬꼬지 심쿵

공저 그래 힐링이 살아갈 힘이다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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