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시 옥서면 하제마을, 600년 팽나무 아래에서 팽나무를 꼭 닮은 노인을 만났습니다. 평생을 무조건 탄압받는 사람 편, 무조건 고통받는 사람 편에서 싸워온 노인의 나이는 올해로 83세입니다.

하제마을은 본래 무의인도(無衣人島)라는 이름의 섬이었습니다. 1919, 일본인 후지이 간타로가 세운 후지모토흥업주식회사[不二興業株式會社]가 간척사업을 벌여 육지와 연결되었고 1970년대에는 노랑조개 생산이 크게 늘어나 600여 가구가 거주하는 풍요로운 마을로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마을 인근에 미군부대 탄약고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급변하고 말았습니다. 안전거리 확보 문제로 국방부가 하제 지역 6개 마을 644세대를 강제 이주시키면서 불과 이십여 년 사이 풍요로웠던 마을은 폐허가 되고 600년 팽나무와 200년 된 할머니 소나무만 덩그러니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의 엄청난 변화를 이렇게 보면 분해서 못 살겠어. 그래서 여기 옥봉 마을 입구에 들어와서 미군기지가 보이면 그때부터는 이 등골에 철삿줄이 올라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긴 수염을 휘날리며 팽나무 아래 서 있던 노인은 우리 일행을 보자 곧 분해서 못 살겠다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팔십 노구임에도 목소리에는 아직 쩌렁쩌렁한 울림이 있습니다. 그가 반평생을 의지한 지팡이는 어느덧 은산철벽을 꿰뚫는 주장자가 되어, 마을은 사라졌어도 팽나무만은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듯, 나타(懶惰)에 빠진 중생의 마음을 일깨웁니다.

군산 미군기지는 1940년대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 특공대를 양성하던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 군산분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때는 미 육군 기계화부대가 주둔했으며, 1974년부터 주한미군 제7공군 제8전투비행단이 지금껏 주둔하고 있는데 2004313만 평이던 미군기지 규모는 2020389만 평으로 늘어나 군산시 옥서면(20.88)61.4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미군기지 확장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국토교통부는 오는 2028년 준공을 목표로 새만금 신공항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정부 발표에 의하면 신공항은 현 군산공항에서 서쪽으로 1.3떨어진 새만금 개발부지 안에 순수 민간공항으로 지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공항 건설 계획 철회를 요구하는 시민단체 새만금 신공항 백지화 공동행동은 신공항이 사실상 미 공군의 제2활주로 건설사업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이유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걸까요?

시민단체는 현재 추진 중인 새만금 신공항 사업의 터가 본래 전라북도가 요구했던 만경강 하류 김제 화포지구가 아닌 미군이 희망한 위치라는 점과 애초 사업계획에 없던 군산공항과 새만금 신공항을 연결하는 유도로(Taxyway)가 미군 요구로 추가됐으며, 안전과 효율성 측면을 고려해 하나의 관제탑에서 두 공항을 통제하는 게 적절하다는 미군의 요구가 수용됐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수라갯벌
수라갯벌

 

새만금 국제공항을 만든다? 말이야 근사하지. 거짓말도 그런 거짓말이 없어. 그건 핑계일 뿐이었어. 보니까, 정부가 국민을 속이는 거야. 여기 활주로가 하나 있거든. 수라 갯벌에 활주로 하나 더 만들어서 기존 활주로와 연결시키고 그쪽으로 관제탑을 옮긴다 이거지. 그럼 미군 기지 확장이지, 무슨 국제공항이야 이게.”

노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팽나무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습니다. 채석강 주상절리를 닮은 듯한, 밑동이 울퉁불퉁한 600살 팽나무는 그 옛날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배를 묶는 나무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른 아침, 고기잡이 나가는 어부들은 이곳에서 잠시 발을 멈추고 풍어를 기원했을 것이고, 아낙들은 밤이 깊도록 팽나무 아래를 서성이며 바다로 나간 지아비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어떤 날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술잔을 나누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을 것이고, 또 어떤 날은 정든 고향을 떠나 타지로 쫓겨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인사를 받고 눈물도 많이 흘렸을 것입니다.

가끔씩 낯모르는 사람이 찾아와. 여기에서 살던 사람들이야. 고향이 그리워서.”

문득 600년 팽나무가 트랜스포머로 변신해 악당들을 응징하는 영화를 상상해 봅니다. 트랜스포머가 악당들이 견고하게 구축해놓은 성을 무너트리자 마을은 다시 100년 전 섬으로 변하고 그곳 한적한 어촌마을에서 팽나무와 할아버지 소나무와 할머니 소나무와 마을 사람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엔딩 말입니다. 그땐 새들도 마음 놓고 수라갯벌 위를 날 수 있을 겁니다.

 

이종헌(콩나물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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