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신호등은 빨간색이다. 길 건너편 사람들은 화가 난 듯이 이쪽을 노려보고 서 있다. 나도 덩달아 건너편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왜 그러고 있느냐 말하는 것처럼 끼익!”하고 시내버스가 지나간다. ‘이 도시 부천에도 87번이라는 숫자를 달고 다니는 버스가 있구나.’ 스쳐 지나간 버스 뒤꽁무니를 멀거니 바라본다.

신호등이 초록색 불로 바뀐다. 그제야 사람들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피아노 건반같이 희고 검은 건널목을 가뿟하게 오간다. 나도 건너가야 한다. 그러나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서 있다.

기억이란 마음 내키는 곳에 드러눕는 개와 같다.’라는 말이 있다. 늘 가슴속에 품고 사는 내 고향 부산에도 87번 버스가 있었다. 아버지, 엄마, 나의 형제들이 살았던 집 앞의 바로 그 버스.

뒷걸음질 친 기억 속의 버스 문이 열린다. 치마를 살짝 걷어 올린 나는 버스에 깡충 올라탄다. 차 안은 아늑하다. 버스는 전력 질주하여 고향 집 앞 87번 정류장에 나를 내려놓는다.

낡고 칠이 바랜 나무 대문을 밀며 다녀왔습니다.”하고 크게 소리친다. 늘 코가 막혀 숨 쉬는 소리가 픽픽거렸던 털북숭이 개는 여전히 멍멍 대신에 픽픽거리며 반긴다. 개 이름도 픽픽이었어. 버스 정류장 길가에 있는 우리 집 덕분에 픽픽이 하얀 털은 먹물이 묻어 있는 붓털 같다.

 

감천문화마을 *사진출처(픽사베이)
감천문화마을 *사진출처(픽사베이)

 

집의 담은 아주 낮다. 덩치 커다란 87번 버스는 담 낮은 집을 오라잇! 할 때까지 목을 빼 우리 집을 구경한다. 같은 버스 안에서 몇 번 어색하게 눈이 마주쳤던 남학생의 목은 아예 담 위에 얹혀있다. 버스가 멈추는 순간에 우리 가족은 모두 동작 그만!’하는 자세가 된다. 크르렁 거리며 버스가 지나가고 나면 볼멘소리로 나는 말한다.

남싸시러버 죽겠다! 버스 안의 머스마들이 금방이라도 내릴 듯이 집안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이가!” 남자애들이 목매도록 쳐다본다는 소리에 딸 많은 집의 다혈질 엄마는 에라이껏!” 하면서 집 앞 배나무를 다 베어버릴 기세다.

화석처럼 굳어졌다고 생각한 과거의 끈은 자꾸 이어 나간다. 마당 한 편에 있던 돌배나무의 꽃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나면 여름이 찾아온다. 새하얀 해가 질리도록 뜨겁던 여름날, 엄마는 뒤란 우물을 청소한다. 우물 안의 이끼 낀 돌을 차근차근 밟고 내려가서 두레박에다 물을 퍼 담아 올린다. 어둡고 그 깊은 물 속으로 엄마가 사라질까 봐 우리 형제들은 계속 엄마를 부른다. 한참 만에 우물 위로 올라온 엄마는 온몸이 다 젖어있다. 두레박에 김치와 과일을 묶어 우물 밑으로 내려놓던 엄마가 말한다.

땅 밑에는 근심이 없겠더라.”

찬 우물 속에 있다 온 엄마의 몸보다 더 서늘한 혼자만의 말이었다그렇게 찾아온 우리 집의 여름에 어김없이 장마도 끼어든다. 우물 바닥을 청소하던 엄마의 자리는 이제 낡은 기와지붕으로 올라가 있다. 유독 딸들의 방에만 비가 샜다. 딸들 방에 군데군데 대야가 받쳐질 즈음이면 엄마는 낮은 담 위를, 기와지붕을 수없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내 고향 집 기억의 편린 속에, 아버지는 무슨 일 때문에 늘 부재(不在)였을까.

누구나 그들만의 하잘것없는 기억과 사소한 이야기를 안고 산다. 행복만을 갈망한 적도 많았다. 아침의 환한 햇살처럼, 삶에도 윤택함과 화려함만이 반짝거려주길 원했다. 고향 떠나 처음 발 디딘 동네는 산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꽃이 피고 예쁜 단풍이 지고 나면 새하얀 눈이 내리는 산인 줄로만 알았다. 지대가 높아 물이 잘 안 나오는 것도, 방값이 싸 유흥가 여자들의 악다구니와 싸구려 분내가 지분거리는 것도 한참 만에야 알았다. 비가 많이 온 다음 날에는 산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곳으로 간다. 돌을 괴어 물을 가두고 함지박에 담아 갔던 빨래를 하고 아이와 함께 돌아오는 길에는, 산새가 울었다.

살아가면서 나를 인간답게 하는 건 행복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해 질 녘에 부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버스처럼, 다소 어둡고 쓸쓸한 슬픔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추하기도 하고 비루하기도 한 상처를 향해 깊은 시선을 보내는 내게, 길거리의 신호등이 삼색 눈 끔뻑이며 말한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어디에 정착할지도 모르는 몽환적인 이 버스에서 내리라고.

나만이 간직한 차 안에는 술에 취해 졸고 있는 아버지를 깨워 같이 내리려는 딸이 아직도 타고 있는데. 어슴푸레 잠이 깬 아버지가 가만 보자, 야아가 누구더라?” 하는 말에 알싸한 기억이 아직도 버스에 머뭇거리고 있는데.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넘나들게 했던 버스는, 헛방귀 같은 매연과 그리움을 남기고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지난날의 부스러기들을 조심스럽게 거둬들이며 돌아서야 한다.

그래도 혹, 마음 내키는 대로 드러눕는 내 기억 속의 87번 버스를 아시나요?

 

김영미(수필가)

 

김영미 수필가
김영미 수필가

 

김영미 프로필

36년째,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부산 출생

창조적 언어를 꿈꾸는 수필가(부천수필가협회)

복사골부천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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