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 김소희 만화 / 만만한책방

의식주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가치관에 따라 가중치가 다르기는 하겠지만 생존을 위해 갖춰져야 할 필수적인 최소의 조건이다. 이 의식주 가운데 가장 큰 부담은 주()일 것이다. 요즘 세상에 거친 옷을 두르고 식은 밥일지라도 주린 배를 채울 수는 있다고 믿는다. 허나 거처를 마련하기는 쉽지 않다. 옷과 밥은 어렵지 않게 내주어도 공간을 내주기는 여러 사정상 어렵다. 해가 서쪽 하늘로 저물 때 피곤한 육신을 누이고 휴식을 취할 일정한 주거 공간이 없다면 그 마음이 어떨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누구에게나 마음 편하게 머리 둘 자리가 있어야 한다. 이건 우리 모두의 기본 권리이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일을 시작하려면 크고 작은 공간이 필요하다. 동네에서 작은 모임을 하나 하려고 해도 일정하고 안정적인 공간이 있어야 한다. 공간은 공간으로 머물지 않고 모임의 구심점이 되고 모임에 확장성을 준다. 우리만의 공간이 주는 심리적 안정은 창의력, 집중력을 높이고 모임 구성원에게 소속감을 준다. 모임의 지속 여부, 사업의 성패에 공간이 주는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고 어떤 경우 절대적이기도 하다. 이렇게 공간은 공간 이상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주거로의 공간, 모임, 사업을 위한 공간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공간을 꿈꾸는 사람들도 많다. 나만의 방을, 독립된 자기만의 공간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 평생 나만의 공간을 가져 본 경험이 없다. 식구가 많은 어릴 때는 형과 함께 방을 썼고 독립해서도 여전히 형과 함께 공간을 공유했다. 결혼 후에는 아내가 있었고, 아이를 키우면서는 아이 방을 주느라 나만의 공간을 누려본 일이 없다. 반백 년을 넘게 살았는데 더 늦기 전에 3~4평이라도 내 공간을 갖는 것이 바람 가운데 하나다.

1호선 경인 전철 선로를 따라 역마다 북부와 남부로 지역을 구분한다. 아는 분들은 알겠지만 희한하게도 경인선 철로를 기준으로 잘 넘어 다니지 않는다. 마치 심리적 휴전선과 같다. 나는 역곡 북부에서 40년을 넘게 살고 있다. 그러다가 2015년 아무 연고가 없는 역곡 남부에 언덕위광장 작은 도서관을 개관했다. 사실 가장 먼저 본 장소는 가톨릭대 근처 지하였다. 50050으로 계약하려고 했으나 건물주 할아버지가 막판에 뒤집어 계약이 불발됐고 이후 부동산에서 남부로 넘어가면 비슷한 금액에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설득해서 남부의 몇 곳을 보게 됐다. 같은 부천이고 역곡이지만 남부로는 정말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하도 마다하지 않고 북부에서 찾고 또 찾았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수중에 가용할 수 있는 돈은 700만 원이 전부였다. 결국 돈이 원수다.

드디어 70045로 역곡 남부의 한 언덕 위 허름한 집 2층에 도서관을 개관했다. 오랜 고민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도 지하가 아닌 게 어디냐라며 위로했지만, 여름이면 창틀에서 떨어지는 빗물, 걸어 다니기만 해도 층간 소음을 호소하고 3층의 치매 할아버지는 수시로 내려와 이곳은 뭐 하는 곳이냐?’라고 묻고, 겨울이면 얼어 터지는 화장실까지. 게다가 아는 이 전혀 없는 낯선 곳에서 외로움이 더해지면서 남부로 넘어온 것에 대한 후회와 자책으로 한동안 마음이 어려웠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다행히 지역에 좋은 분들을 통해 외로움은 사라졌지만, 열악한 환경은 그곳을 극적으로 떠나오기 전까지 스트레스였다.

 

김소희 만화 『자리』 표지
김소희 만화 『자리』 표지

 

김소희 작가의 만화 자리. 맘 편히 그림 작업하기 위한 공간 하나 얻으면 좋겠다고, 기왕 큰소리치고 독립을 선언했으니, 주거도 겸할 수 있어야 한다. 수중의 돈을 탈탈 털어 들어간 첫 작업실 겸 거주 공간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문 닫은 목욕탕이다. 인테리어는 고사하고 내부 수리조차 할 수 없다. 차가운 냉기에 난로 하나로 맞서보지만 결국 첫 공간에서 4개월 만에 퇴각할 수밖에 없다. 이어 옥탑으로 올라가고, 다시 지하로 내려오는 두 청춘. 지하 2층 주차장 구석의 컨테이너 공간은 아니다 싶어 선택한 방은 벽이 합판이었고 덕분에 옆 방의 숨소리까지 생중계가 된다. 그리고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 계획과 꿈과 거기에 아픈 몸까지. 허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20대 청춘의 현실 보고서다.

진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머물 <자리>를 찾아 헤맸던 가난한 두 청춘의 이사 여정!’이라는 뒤표지의 문구가 가슴에 꽂힌다. 아프니깐 청춘이라고 말하기 전에 건강한 사회라면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청춘에게 머물 자리하나쯤은 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 머물 자리를 위해 자기 자리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품 나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

 

남태일(언덕위광장 광장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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