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칼럼

최근 부천시일쉼지원센터에서 주최하는 온전한 하루 <쉬다>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노동/사회/복지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의 자기돌봄’, ‘쉬다’, ‘온전한 하루라는 문구에 자석처럼 끌려 쉴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참여한 것이다.

온전한 하루 <쉬다>는 마음 돌봄, 몸 돌봄, 서로 돌봄까지 말 그대로 거의 온전한 하루에 걸쳐 이 진행되었는데 나의 첫 느낌은 불안이었다. 사무실에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잔뜩 쌓여있고, 이 온전한 쉼(?)이 끝나도 쌓여있는 일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내 앞에 나타날 것이기에 차라리 잠깐의 쉼보다는 해야 할 일을 빨리 끝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에 매일 일 속에 파묻혀 있다가 녹초가 되어 퇴근하는 것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잔뜩 기대를 안고 온 여느 참가자와 달리 처음부터 나는 불안과 초조, 긴장을 그대로 옮겨가 몸만 그 자리에 앉혀놓은 요주의 인물이었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사진출처(픽사베이)

 

그런데 정작 내가 학교에서 노동 인권교육을 통해 만나는 청소년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는 인간의 존엄이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서 존엄한 존재인 사람이 되었고, 노동의 이유는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노동을, 노동하는 사람을 존엄하게 대하는가? 노동이, 노동자가 존엄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바뀌어야 할지 고민해보자 뭐 이런 이야기인데. 정작 나는 존엄한 존재는커녕 단 하루의 온전한 쉼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못하고 잔뜩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감정노동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시행된 지도 5년이 넘었다. ‘감정노동은 흔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있더라도 그것을 억누르거나 숨기고 정해진 감정표현을 연기하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콜센터나 고객센터, 백화점, 마트 등에서 고객응대 업무를 하는 노동자를 일컫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 감정노동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을 벗어나, 아예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상태 또는 느끼지 않고 행(해야)하는 노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매뉴얼대로 대응하는 로봇, 기계가 되는 것이다. 로봇이나 기계에 존엄이나 고귀함 따위가 불필요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결국 사람이기에. 휴식도, 돌봄도, 존엄함도, 고귀함도, 감정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노동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사진출처(픽사베이)

 

인간의 평균수명이 83.6세에 달하고, 그중 인생의 가장 많은 시간-26-을 누구나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나의 노동과 노동 현장, 그 속에서 맺게 되는 모든 관계가 스스로의 존엄함을 높여주고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매일매일 해야 할 일 속에 파묻혀 감정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매뉴얼대로 처리하면서 기계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최현주(부천시비정규직근로자지원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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