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이민진의 장편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을 읽다가 책에 밑줄을 긋는다.

케이시는 아버지가 겪은 고난에 대해 무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정말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1993년이다. 하지만 부모님의 식탁에만 앉으면 한국전쟁이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끔 딸과 함께하는 식사 시간, 시작은 늘 화기애애했다. 조촐한 안주에 몇 잔의 술이 오가고 부녀간에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그야말로 행복한 저녁 식탁이다. 딱 그 정도면 좋았을 것이다. 기분 좋다며 한 잔 두 잔이 한 병이 되고 남편의 얼굴이 불콰해지기 시작하면 눈의 초점이 흐려지면서 안갯속 저 너머 옛 시절로 되돌아간다.

대부분 사람들은 몰아치는 폭풍우를 온몸으로 맞으며 버텨온 지독했던 가난을 회상하면 그 기억들에 몸서리칠 텐데, 남편은 그때의 고생을 마치 훈장처럼 자랑스러워했다. 아홉 살에 남한으로 피난 온 실향민 아버지를 잃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동안 다닌 공장이 열다섯 곳이 넘는다는 둥. 문제는 가족들이 한데 모이고 술만 들어가면 그 이야기들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알딸딸하게 오른 딸의 얼굴에 지루함이 역력하다.

아빠 그 인생 스토리 이제 좀 그만하면 안 될까. 백번은 더 들은 것 같아.”

술김에 용기를 얻었는지 딸은 지겹다는 듯이 아빠의 말을 제지하기 시작한다.

딸 또한 남동생만 편애하고 자신에게는 무관심했다는 지난 이야기를 꺼내며 아빠를 송곳눈으로 바라봤다. 그게 아니라고 변명을 할수록 딸은 더 메꿎게 굴었다. 점점 남편의 얼굴색이 바뀌기 시작한다.

불그스레했던 빛깔이 노랗게 변하면 화를 참는 한계가 지났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돌려보려는 내 노력보다 부녀의 감정싸움은 점점 심각해지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진다.

드디어 남편의 입에서

당장 나가라는 폭발음이 들리고 딸은 울면서 뛰쳐나가는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딸이 친정에 올 때마다 대부분 저녁은 그런 식으로 끝났다. 그놈의 술이 문제인지, 아님 마음속 깊이 응어리진 원망이 문제인지, 세대 간 바라보는 눈높이가 문제인지, 딸과 남편의 대립에 살얼음을 걷는 세월이 무심히 흘렀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사진 출처 (픽사베이)

 

15년이 지나 남편과 사별한 딸이 친정으로 들어왔다. 겉모습은 결혼 전 그대로다. 그냥 긴 여행을 마치고 제집으로 돌아온 것 같다. 달라진 게 있다면 딸이 식탁에서 말수가 줄었다는 것이다. 갓 잡은 은갈치처럼 펄떡펄떡 뛰던 활기가 사라지고 가재미 마냥 바닥으로 착 가라앉았다. 눈도 생기를 잃고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남편이 아무리 찔러보고 건드려도 꿈쩍도 안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차츰 남편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좋아하던 술도 줄이고 귀가 솔게 듣던, 죽으려고 찾아갔던 당인리 발전소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지난날의 감정은 송두리째 잊어버린 듯 딸을 바라보는 눈빛도 솜털처럼 포근하다. 수탉이 알을 품으면 저런 모습일까.

뒤뚱뒤뚱 어설프지만 알을 보호하려는 부성애가 눈물겹다.

대부분 딸과 아빠의 관계는 애정이 넘치고 돈독하다는데 우리 집만 유난하나 싶었다. 주인공 케이시와 아버지와의 갈등을 보면서 나름 위안을 얻었다.

전쟁을 겪고 피난처를 찾아 미국까지 이민을 가야했던 한 가장의 깊은 고집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 아버지의 굵은 주름에 내 남편의 얼굴도 겹쳐 가슴이 아리다. 케이시도 세월을 먹으며 세상 풍파를 견디다 보면 아버지 조셉도 수탉처럼 딸을 품게 되리라.

요즘 딸과 함께하는 저녁 밥상이 그늑하다.

 

한성희(수필가)

 

한성희 수필가
한성희 수필가

 

한성희 프로필

2005<수필시대> 등단, 2006년 제3회 부천신인문학상 수필부문 수상

올해의 예술가상(2011), 2회 올해의 부천작가상 수상(2020)

복사골문학회 하우고개 수필동인, 국제 PEN 한국본부 회원, 수필집 가시연빅토리아(2011), 산문집 그곳에 가면(2019), 수필집 넘다! 십이령(202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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