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둘레길 제4코스 ‘황금들판길’

원천공원에서 부천이 새삼 물의 도시라는 사실에 놀라며 시민의 강을 따라 유럽풍 낭만의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덧 강은 사라지고 육중한 몸체의 고가차도만 남는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차량들, 수시로 마주치는 횡단보도, 점멸하는 신호등, 계속해서 머리를 짓누르는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 등등 상동호수공원부터 굴포천에 이르는 길은 여러 부천둘레길 가운데 최악이다. 일부러 극기훈련을 자청하지 않고 말 그대로 힐링을 위해서라면 이번 코스는 피하는 게 좋겠다.

 

굴포천 표지판
굴포천 표지판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의 악몽에서 벗어나 굴포천을 따라 길게 이어진 수변 길을 걷노라면 원천공원에서 놀라움과 함께 머릿속에 그려보았던 물의 도시 부천의 이미지가 다시 떠오른다. MB정권 때였을까? 한때는 이곳 골포천에 부천항을 건설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아라뱃길에 컨테이너선 한 척 다니지 않기에 그런 주장이 먹히지 않겠지만, 또 언제 어떤 지도자가 나와 부천항건설을 외쳐댈지 누가 알겠는가? 두 눈 부릅뜨고 지키지 않으면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생명들은 또 어쩌란 말인가? 그렇게 많은 천문학적 돈을 들여서 내륙 항구를 건설할 바엔 차라리 굴포천을 3백만 인천시민과 80만 부천시민 모두에게 사랑받는 생태하천으로 만드는 게 백배 천배 더 낫지 않을까 한다.

 

부천둘레길 제4코스 '황금들판길' 출발점에서 바라본 굴포천 
부천둘레길 제4코스 '황금들판길' 출발점에서 바라본 굴포천 

 

지금 백로 한 마리가 홀로 서서 망중한을 즐기는 굴포천의 물빛은 진한 녹차색이다. (약간의 악취도 풍긴다)

부천둘레길 제4코스황금들판길은 봉오대로에서 대장들판과 오정대공원을 거쳐 변종인신도비에 이르는 총연장 13km의 거리이다.

한때는 부천둘레길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장 평화롭고 가장 친환경적인 길로 외지인들에게도 인기 높은 코스였으나 안타깝게도 중심 무대인 대장들녘은 현재 부천대장 공공주택지구 조성공사 1공구 현장으로 지정되어 공사 관계자 외의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상태다.

 

출입금지를 알리는 팻말
출입금지를 알리는 팻말
황금들판길 쌍수문 가는 길에서 만난 쉼터.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면 솟대 위의 청둥오리도 곧 먼 길을 떠나야 한다.
황금들판길 쌍수문 가는 길에서 만난 쉼터.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면 솟대 위의 청둥오리도 곧 먼 길을 떠나야 한다.

 

대장들녘은 김포공항 남서쪽에 형성된 넓은 평야로 지리적으로 서울시, 인천시와 접하고 한강하구의 굴포천과 인접해 있다. 규모는 부천시 행정구역만 약 120만 평으로 굴포천 동쪽의 서울시 강서구 오곡동 논 습지와 합치면 240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이다. 또한 동부간선수로, 굴포천, 베르네천, 여월천이 흐르고 있어 법정보호종만 최소 32(야생조류 27, 양서 파충류 4, 포유류 1) 등 다양한 생물종들이 서식하는 그야말로 수도권에서 보기 드문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동안 부천의 허파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인구밀도, 산림면적, 불투수면적률, 녹지율, 1인당 생활권 도시숲 면적 등 각종 지표에서 최하위를 면치 못하고 있는 부천시의 마지막 환경 보루로 그 상징적 의미가 매우 컸던 곳이라서 그런지 제3기 대장신도시 건설로 인한 시민들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머지않아 3기 대장 신도시가 완성되면 끊어진 둘레길은 또 어떻게 이어지겠지만 이제 다시 황금들판길이라는 이름만은 사용할 수 없게 되리라.

길이 바뀌면 옛 이름 또한 사라지는 법, 대장들녘 황금들판길을 걸을 때마다 늘 카메라에 담곤 했던 쌍수문, 꺼먹다리, 말무덤, 긴등다리와 같은 이름도 더는 부를 수 없게 되리라.

 

1년전인 2022년, 10월 대장동 들판을 걸으며 찍은 사진들. 멀리 계양산이 우뚝 솟아있다.
1년전인 2022년, 10월 대장동 들판을 걸으며 찍은 사진들. 멀리 계양산이 우뚝 솟아있다.
1년전인 2022년, 10월 대장동 들판을 걸으며 찍은 사진들
1년전인 2022년, 10월 대장동 들판을 걸으며 찍은 사진들
1년전인 2022년, 10월 대장동 들판을 걸으며 찍은 사진들. 멀리 북한산 여러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1년전인 2022년, 10월 대장동 들판을 걸으며 찍은 사진들. 멀리 북한산 여러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쌍수문부터 꺼먹다리까지는 일직선으로 된 곧은 길이다. 그 길에 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북한산, 관악산, 계양산 등 사방 명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일 뿐만 아니라 양팔 벌린 채 하늘을 향하고 있으면 몸은 어느덧 한 점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명색이 시인인데 그런 곳에서 어찌 시 한 수가 없을까 보냐. 2018년에 우형숙 교수가 부천 시인들의 작품을 모아 60, 부천을 노래하다(가온출판사)라는 시집을 낸 적 있는데 그 시집 속에 대장동 들판에 서서라는 졸시 한편이 들어있다.

 

대장동 들판에 서서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의 황금물결과

그 물결 너머로 불끈 솟아오른

북한산 연봉들을 보지 않으셨다면

아직 부천에 대해 말하지 말아주세요

 

눈 덮인 대장동 들판에 서서

무리 지어 나는 새들의 화려한 군무와

그 새들의 우렁찬 울음소리

들어보지 않으셨다면

아직 부천에 대해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 마을 어름의 허름한 목로주점에 앉아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아기 장수와 말 무덤에 대한 얘기

들어보지 않으셨다면

아직 부천에 대해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렇더라도, 대장동 들길을 걸으며

멀리 계양산 너머로 스러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지 않으셨다면

그 해를 바라보며 뜻 모를 눈물 한 방울

흘려보지 않으셨다면

아직은 부천에 대해 말하지 말아주세요

-현해당 시 대장동 들판에 서서전문-

2022년, 10월 대장동 들판을 걸으며 찍은 사진. 쌍수문에서 꺼먹다리로 가는 일직선 길. 이제 곧 길은 사라지고 새로운 길들이 자랑스럽게 대장동 황금들판을 가로지를 것이다. 그 길의 모습은 아마도 아래 사진과 같으리라.
2022년, 10월 대장동 들판을 걸으며 찍은 사진. 쌍수문에서 꺼먹다리로 가는 일직선 길. 이제 곧 길은 사라지고 새로운 길들이 자랑스럽게 대장동 황금들판을 가로지를 것이다. 그 길의 모습은 아마도 아래 사진과 같으리라.
새롭게 조성된 여월천
새롭게 조성된 여월천
2023년, 11월 대장동 들판을 걸으며 찍은 사진
2023년, 11월 대장동 들판을 걸으며 찍은 사진
동부간선수로
동부간선수로

 

지난해인가, 모 미디어 회사에서 대장동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겠다면서 위의 시를 사용해도 좋겠냐는 요청을 하길래 흔쾌히 그러시라고 했다. 하지만 대장들녘이 사라진 다음에 그런시 백편 천편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뭐든 사라지고 나면 다 부질없는 일이다.

외부인 출입금지를 알리는 팻말 앞에 서서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가 다시 길을 나서려니 바로 앞에 1925년 완공되어 근 100년 동안 대장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던 동부간선수로(東部幹線水路), 일명 데보둑이 용도 폐기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홀로 지친 몸을 뒤척이고 있다.

황금들판길에서 만난 다양한 조류들. 새들은 아직 제 운명을 알지 못한다. (사진 김동숙)
황금들판길에서 만난 다양한 조류들. 새들은 아직 제 운명을 알지 못한다. (사진 김동숙)
황금들판길에서 만난 다양한 조류들. 새들은 아직 제 운명을 알지 못한다. (사진 김동숙)
황금들판길에서 만난 다양한 조류들. 새들은 아직 제 운명을 알지 못한다. (사진 김동숙)
황금들판길에서 만난 다양한 조류들. 새들은 아직 제 운명을 알지 못한다. (사진 김동숙)
황금들판길에서 만난 다양한 조류들. 새들은 아직 제 운명을 알지 못한다. (사진 김동숙)
황금들판길에서 만난 다양한 조류들. 새들은 아직 제 운명을 알지 못한다. (사진 김동숙)
황금들판길에서 만난 다양한 조류들. 새들은 아직 제 운명을 알지 못한다. (사진 김동숙)

 

현해당(시인, 인문기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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