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부천군 역사 - 제40회

1930(소화 5) 6, 부천군에서 발간한 <소화 4년 경기도 부천군 군세일반(昭話四年京畿道富川郡郡勢一班)>에는 부천군 직원에 대한 상세한 언급이 있습니다. 최고위직인 군수(郡守)를 시작으로 직급에 따라 인원수를 표시해놓았는데, 11개의 직급 중에 눈에 띄는 직종이 바로 구장(區長)입니다. 군수, 면서기, 면장 등은 많이 들어보았으나 구장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어 낯설기 때문입니다.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행정구역 체계가 조선총독부-()-부군(府郡)-()’으로 이루어져 있어 말단 행정체계의 장()이 면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면장 아래 구장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군수, 군속, 군기수, 군산림주사, 군세무리, 산업기수, 면장까지는 임명이 되면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리게 되었지만, 구장은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리지 않았기 때문에 구장에 관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부천군에 있었던 리()가 총 146개였고 구장이 144명이었으므로 마을 1개당 구장이 1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요즘으로 보면 이장 또는 통장과 같은 직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를 토대로 구장(區長)들의 활동상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소화 4년 경기도 부천군 군세일반> 속 군면직원

군수

군속郡屬

군기수

郡技手

군산림주사

郡山林主事

군세무리

郡稅務吏

산업기수

産業技手

고원

雇員

면장

面長

면서기

面書記

면기수

面技手

구장

區長

1

9

1

1

1

4

1

0

1

5

6

6

5

1

4

4

 

 

1. (區長會議) 참석

구장회의는 대체로 면장이 진행했거나 구장 중 한명이 의장이 되어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면장회의 결과 나온 행정지시 사항 및 실행사항을 구장들이 협의하고 그 내용을 마을 주민에게 전달하였습니다.

 

2. 구장회의 내용

각종 세금 징수에 관한 내용 공유와 징수 독려

일제는 각종 세금을 명목을 세분화하여 조선인들에게 매겼습니다. 지세(地稅), 지주납세(地主納稅), 잡종금(雜種金), 지방비납세(地方費納稅) 등이 대표적이며, 이러한 세금들을 기한내에 납부하라고 독려하는 것도 구장들의 몫이었습니다.

 

농사 개량

일제는 농업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보급하였습니다. 양잠[蠶業], 목화재배, 뽕나무 재배[植桑], 양돈(養豚), 축사[牛豚舍] 개량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심지어 논에 나는 피를 뽑거나 보리 베는 것, 목화 제초, 논 제초 등 날짜까지 정해 농사를 짓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지력(地力)을 높이는 퇴비 증산에도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자원의 수탈

토지 및 임야 이동 측량, 토지분할 측량, 사유림 벌채 등 조선에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수탈할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내선일체와 공출

구장회의 전 궁성요배와 황국신민 서사를 외운 후 회의를 진행하였으며(영원면 구장회의. 1939424일 매일신보), 미영 타도를 굳게 맹세하였습니다. (이천 이동면 구장회의 1942131일 매일신보) 1940년 이후 침략 전쟁으로 부족한 물자를 조선에서 충당하기 위해 공출을 구장들을 통해 진행하였습니다. 또한 근로보국대, 부인회, 국민정신총동원 등 일제의 침략 전쟁으로 인해 부족한 인적 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조직하였는데 이러한 일 또한 구장이 실행했습니다.

 

소사읍 구장회 기사
소사읍 구장회 기사

 

3. 부천군에서의 구장들의 활동

그렇다면 이 당시 부천군 구장회의에서는 어떠한 내용들이 논의되고 실행되었을까요? 부천군에서의 구장회의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3~4건의 기사를 통해 추측할 수 있습니다.

 

종두(種痘)

19259월 동아일보에 의하면 소래면 구장회의가 열리는데 결의사항은 추기종두(秋期種痘), 추기청결(秋期淸潔), 도로수축(道路修築), 개량온돌(改良溫突), 호역(虎疫) 예방에 관한 건(*호역은 콜레라를 의미) 등이었습니다. 질병 예방, 생활 수준 향상, 사회 기반 시설의 확충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종두 시행이 바로 구장의 집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제목 : 부천종두일(富川種痘日)
부천군 읍내의 춘계(春季) 종두는 다음과 같은 일할로 시행한다는데 종두를 넣은 뒤 엿새 만에 검종(檢種)을 한다하며 장소는 그 동리 구장(區長)의 집에서 한다고
428일 부평(富平), 하가현리(下佳峴里)
29일 신대(新垈), 화전(化田), 학정(鶴井), 도두리(道頭里)
30일 임학(林鶴), 용종(龍宗), 병악(兵樂), 방축(防築), 박촌리(朴村里)
51일 동양(東陽), 귤현리(橘峴里)
2일 상야(上野), 하야(下野), 평리(坪里)
3일 노오지(老吾地), 선주지(仙住地), 장기리(塲基里)
4일 이화(梨花), 오류리(梧柳里)
5일 갈산(葛山), 다남리(多男里)
6일 목상(木霜), 소사(素砂), 보리(寶里)

출처 : 1924414일 동아일보

 

공출

1938년 소래면에서는 군용마량대맥공출(軍用馬糧大麥供出)’, 즉 군사용 말의 식량을 위해 밀가루의 공출이 이루어집니다. 이외에도 농촌진흥회 부인회조직, 방호조합 조직, 저축보국(貯蓄報國) 등이 진행되었습니다. (1938630일 동아일보 )

 

송탄유 채취

1943년 특이한 사업이 추진됩니다. 바로 송탄유 채취입니다. 일제가 군용기 연료로 사용하는 송탄유를 보충하기 위해 부천군 소사읍에서 진행하였습니다. (1943817일 매일신보) 지난 202111월에 해인사로 유명한 가야산 홍류동계곡을 걸은 적이 있는데, 이때 노송(老松)에 일제가 송진을 채취했던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우리 부천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일제강점기~1960년대까지 행해진 송진 채취
일제강점기~1960년대까지 행해진 송진 채취
송진 채취과정에서 생긴 빗살무늬 상처
송진 채취과정에서 생긴 빗살무늬 상처

 

기우제

1929, 부천군에 가뭄이 심했습니다. 이로 인해 모판에 있는 모가 말라 죽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625일 소사공립보통학교에 면장과 구장 총 170여 명이 모여 모내기 상황을 파악하였으며, 모내기를 못 할 시 대신 심을 작물을 준비할 회의를 진행하였습니다. 630일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부천군에서는 문학산과 계양산에서 기우제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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