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지속협과 함께 하는 부천둘레길 6구간 48Km 모니터링(제7회)

부천둘레길 제5코스 누리길은 베르네천 발원지인 산울림청소년센터를 출발하여 이한규 묘, 옹기박물관, 백만송이장미원, 아기장수바위, 벚꽃동산, 춘의정, 종합운동장역에 이르는 약 7코스이다. 본래 베르네천 발원지는 칠일약수터로 알려져 있지만 사시사철 물의 흐름을 유지하기에는 수량이 턱없이 부족한지라 실제로는 부천 남부수자원생태공원에서 고도처리한 하수를 끌어다 윗물로 쓴다. 옛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생활하수를 재처리한 물이다 보니 산울림청소년센터 지하에서 베르네천으로 분출되어 나오는 물줄기에는 화학 약품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다. 그 물이 희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증기기관차처럼 빠른 속도로 밤골 먹거리촌을 지나 여월동 베르네천으로 흘러드는데 산책로를 따라 잉어며 붕어, 송사리 같은 물고기들이 무리 지어 노닐 뿐만 아니라 그 물고기들을 먹이 삼아 청둥오리며 왜가리, 백로 등이 서식하는 것을 보면 이것을 과학의 승리라고 해야 할지 생명의 위대함이라고 해야 할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지곤 한다.

 

 

베르네천을 따라가다 휴먼시아 3단지 한우리요양병원 앞에서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좌회전, 도유네무인카페를 지나 직진하면 부천시 향토문화재 제4<이한규 묘>가 나온다.

묘역의 서쪽 출입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겼는데 남쪽으로 이어진 철제 펜스는 힘 안 들이고 넘나들 수 있을 만큼 높이가 낮다. 뭐든 좋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필자인지라 출입을 허락하는 것으로 알고 안으로 들어서니 묘역 안은 생각보다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

입구에는 이곳이 <이한규 묘>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표지석이 나란히 서 있는데 표지판은 국문 표기 아래 영문 표기를 따로 적었으며 비교적 최근에 조성된 듯하나 연도 표시가 없고, 표지석은 영문 표기 없이 국한문혼용체만을 사용했는데 지난 20045, 이곳을 부천시 향토유적 4호로 지정하면서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표지판과 표지석의 내용은 각각 아래와 같다.

 

이한규 묘 표지판
이한규 묘 표지판

이한규 묘┃李漢珪 墓

부천시 향토문화유산Bucheon-si Municipal Cultural Heritage

조선시대의 무신 이한규(李漢珪, 1650~1729)와 부인 안동권씨의 합장묘이다. 이한규는 조선 제4대 왕 세종(1418~1450 재위)의 아홉째 아들인 화의군(和義君, 1425~?)6세손이다. 숙종 2(1676) 무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두루 지냈다. 무관임에도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장수가 되는 도()는 명을 받는 날에 그 집안을 잊어야 하고, 진영을 방비하기로 약속함에 임하여서는 그 어버이를 잊어야 하며, 북채를 두드리면 자기 자신을 잊어야 한다며 군관들을 격려하였다.

이한규의 묘는 본래 경기도 양주에 있었는데, 영조 19(1743) 전주이씨 화의군파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로 묘를 옮겼다.

봉분 아랫부분에 돌을 둘렀는데, 이러한 형태는 조선 전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돌에는 12간지를 나타내는 동물을 새겼다. 묘 앞에는 묘비, 제물을 차려놓는 상석, 혼이 나와 노닌다는 혼유석,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불을 밝히는 장명등, 문인 모양의 문인석을 갖추었다. 묘비의 비문은 정조 4(1780) 증손자 이문덕(李文德)이 지었다.

 

이한규 묘 표지석
이한규 묘 표지석

좌찬성 이한규공지묘 연혁(부천시 향토유적 4)

세종대왕 왕자 충경공(忠景公) 화의군(和義君) () ()6세손 좌찬성(左贊成) 이한규 공은 인조 무인년(1638) 호판 휘 상지공과 언양 김씨 사이의 독자로 출생하시어 숙종 병진년(1676) 무과에 급제하신 뒤 병마절도사(2) 및 형조판서(2)와 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2)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시고 숭정대부 좌찬성 판의금부사(1)에 추증되시다. 품성이 독실하시고 공()을 위해 사()를 버리셨으며 청백하고 엄격한 정사로 감영이나 읍진의 백성이 한결같이 믿고 따름으로써 가시는 곳마다 송덕비를 세워 그 덕을 칭송하다. 영조 기유년(1729)에 졸하시니 양주에 장사했다가 1743년 현 위치로 이장하다. 장명등은 일본인이 훔쳐가는 것을 빼앗아 세워놓았으나 묘역에 있던 사당은 소실(燒失)되었고 하마비는 도굴돼 없어지다. 현재 경상남도 진주성 촉석루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재직 때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는 청덕선정비가 세워져 공의 자 휘 여적, 증손 휘 문철, 현손 휘 신경의 거사불망비와 함께 나란히 보전돼 오고 있다. -부천시 향토유적 제4호 지정서(2004527)-

 

두 글의 내용을 비교하며 읽다보니 뜻밖에도 이한규의 출생 연도가 서로 다르다. 표지판에는 1650년으로, 표지석에는 1638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무려 12년이나 차이가 나는데 과연 어떤 게 맞고 어떤 게 틀린 건지, 묘비에는 또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궁금하여 급히 발걸음을 옮겨 보았으나 정조 4(1780)에 건립되어 250여 년의 풍상을 견뎌온 비석인지라 글자의 마멸이 심한 탓에 판독 자체가 쉽지 않다.

조선 증 숭정좌찬성 행 정헌지중추겸도총관 이공 한규 묘 정경부인 안동권씨 부좌
조선 증 숭정좌찬성 행 정헌지중추겸도총관 이공 한규 묘 정경부인 안동권씨 부좌
이한규의 증손자 이문덕이 쓴 묘지명. 이덕수의 묘지명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이한규의 증손자 이문덕이 쓴 묘지명. 이덕수의 묘지명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답답한 마음에 스마트폰을 꺼내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니 다행히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에 이덕수(李德壽, 1673~1744)가 쓴 <증 좌찬성 행 지중추부사 이공 묘지명(贈左贊成行知中樞府事李公墓誌銘)>이 있다. 이덕수의 묘지명에 따르면, 이한규는 80세 때인 기유년(1729) 88일에 사망했으므로 이를 역산하면 그의 출생 연도는 1650년이 맞다.

그렇다고 표지판에 언급된 내용이 모두 사실과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봉분과 상석 사이에 혼유석이 없음에도 있는 것처럼 기술한 부분, 장수가 되는 도()는 명을 받는 날에 그 집안을 잊어야 하고, 진영을 방비하기로 약속함에 임하여서는 그 어버이를 잊어야 하며, 북채를 두드리면 자기 자신을 잊어야 한다라는 글귀는 이한규가 아들 이여적(李汝迪)이 경상우병사가 되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러 갈 때 손수 써준 것임에도 평소 군관들을 격려한 말이라는 설명은 시정이 필요하다.

내친김에 이한규에 대한 자료를 좀 더 검색해 보니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1728(영조 4) 영남에 난적이 창궐했을 때 왕의 친위병을 이끌고 남하하여 난적의 무리 가운데로 들어가 평정하였으며, 이듬해 68살을 일기로 타계하였다라고 잘못 기록하고 있고, 부천시청 홈페이지 부천시 향토문화재 코너 역시 이한규의 생년을 1662년으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부천시 향토유적 제4호 '이한규 묘'
부천시 향토유적 제4호 '이한규 묘'
장명등
장명등
문인석과 망주석
문인석과 망주석
봉분 아랫부분에 돌을 둘렀는데, 돌에는 12간지를 나타내는 동물을 새겼다.
봉분 아랫부분에 돌을 둘렀는데, 돌에는 12간지를 나타내는 동물을 새겼다.

 

부천제일경(富川第一景) ‘도당낙조(陶唐落照)’

 

지난해 부천시에서 부천 팔경을 선정해 발표했는데 제1경은 백만송이장미원이요, 2경은 부천 자연생태공원, 3경은 진달래동산, 4경은 상동호수공원 수피아, 5경은 부천둘레길, 6경은 한국만화박물관, 7경은 부천아트센터, 8경은 부천아트벙커라고 해서 웃은 적이 있다. 팔경이라면 주로 그 지역의 경치 좋은 곳을 이르는 말인데 6경부터 8경까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경치와는 상관없어서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경을 굳이 경치와 연결하지 않고 그냥 명소(名所)’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뭐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이한규 묘에서 너무 시간을 많이 지체한 탓에 옹기박물관을 거쳐 백만송이 장미원에 도착하자 어느덧 해가 서산에 걸렸다. 장미 없는 장미원은 쓸쓸함 그 자체다. 하얀 눈밭에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는 나목들의 비애(悲哀)가 눈물겹다.

 

옹기박물관 전통장작가마
옹기박물관 전통장작가마
부천시립박물관
부천시립박물관
백만송이장미원
백만송이장미원
아기장수바위
아기장수바위
아기장수바위 앞에 선 부천둘레길 모니터링단
아기장수바위 앞에 선 부천둘레길 모니터링단
염창권 시인의 시 「고인돌」
염창권 시인의 시 「고인돌」

 

아기장수 바위에서 염창권 시인의 시 고인돌을 만난 것은 뜻밖의 행운이다. 생면부지의 시인이지만 그의 시는 아주 오래전에 헤어진 친구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반갑다. 도당산 산허리를 넘는데 그의 귀가 밝아서/ 들억새 서걱이는 소리까지/ 뼈에 사무칠 것이므로/ 편안한 잠이 들도록/ 돌이불을 덮어 주었다라는 시구가 계속 내 발꿈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문득 살아오는 동안 내 가슴에 묻은 고인돌은 몇 개나 될지 궁금해졌다.

옛 도당배수지 터에 자리 잡은 부천천문과학관에 오르자 저 멀리 롯데백화점과 푸르지오시티 사이로 홍시처럼 붉은 석양이 걸려있다. 불과 105미터의 낮은 산이지만 부평 김포지역의 평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라 예로부터 도당산은 시인 묵객들의 시 모임 장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나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바라보는 도당산 낙조는 일품 중의 일품으로 마치 호젓한 산사에 앉아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선정 삼매에 빠진 듯한 착각이 든다. 송나라 때 진록(陳錄)이 엮은 '선유문(善誘文)구함이 없는 것이 보시보다 낫다[無求勝布施]라고 했고, “좋은 밭 1만 이랑을 지녔어도 하루에 먹는 것은 두 홉뿐이며, 큰 집이 1천 간이라도 밤에 누울 때는 여덟 자면 충분하다[良田萬頃, 日食二升。大廈千間, 夜臥八尺。]고 했으니 새해에는 쓸데없는 욕심으로 마음을 괴롭히지 말고 베풀되 구함이 없는 삶을 살자.

 

부천천문과학관
부천천문과학관
도당배수지 
도당배수지 
도당배수지 역사
도당배수지 역사
예 도당배수지 자리에 세워진 부천천문과학관
예 도당배수지 자리에 세워진 부천천문과학관
부천제일경 도당낙조
부천제일경 도당낙조
부천제일경 ‘도당낙조’
부천제일경 ‘도당낙조’
부천제일경 ‘도당낙조’
부천제일경 ‘도당낙조’
부천제일경 ‘도당낙조’
부천제일경 ‘도당낙조’
부천제일경 ‘도당낙조’
부천제일경 ‘도당낙조’

 

현해당(시인, 인문기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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