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부천군 역사 41회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부천군에는 총 144명의 구장이 있었으며 그중 가장 활동이 왕성한 사람 중에 한 명이 바로 한기학입니다. 한기학은 부천군 오정면 오곡리에 살았으며, 1935년 당시 16년을 구장으로 활동하였다고 하니(1935325일 동아일보) 오랜 세월 구장을 역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곡리는 대장동 바로 위에 위치한 곳으로 김포군 양서면과 부천군 계양면과 인접하였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1939, 행정구역 조정으로 김포군으로 편입하려는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구장이었던 한기학은 부천군 오정면의 세수 1천여 원이 감소할 것이라고 걱정하며 반대하였습니다. (1939315일 매일신보) 오곡리는 결국 196311일 오쇠리와 함께 부천을 떠나 서울시로 편입되었는데, 현재는 오곡동으로 불리며 대부분 김포공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정면 오곡리 김포군 편입에 반대
오정면 오곡리 김포군 편입에 반대

 

지난 40일제강점기 구장들의 활동상을 통해 조선총독부-군수-면장-구장으로 이어지는 행정체계와 구장들의 대략적인 역할을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는 한기학이라는 구장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오곡리 교풍회(矯風會) 조직

교풍회(矯風會)는 이름 그대로 풍속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오곡리 교풍회는 농예사업의 향상 장려, 경조 상문(慶弔相問), 부업 장려 등 마을의 단합을 유지하며 발전시키는 목적으로 1929년에 조성되었습니다. (1929316일 매일신보)

교풍회는 1920년부터 신문 기사에 등장하는 데 목적을 이해하는 데 백천청년교풍회가 도움이 됩니다. 백천청년교풍회는 권선징악(勸善懲惡), 교육면려(敎育勉勵), 실업 여장(實業勵獎), 지식교환(智識交換), 운동 장려(運動獎勵), 시사강연(時事講演), 근검저축(勤儉貯蓄), 환난상구(患難相救), 경상축하(慶祥祝賀), 자본노동의 협조, 경제발전, 명승고적의 보전유지 등의 활동을 하였는데 그 목적은 일제의 정책에 협력하며 동시에 주민들의 단합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20525일 동아일보-백천청년교풍회(白川靑年矯風會))

 

오곡리 교풍회
오곡리 교풍회

 

2. 각종 단체 임원으로서의 활동 및 표창

한기학은 지역의 유지로서 부천군 관내에 조직되었던 단체 또는 기관 등의 임원, 의원 등을 다수 역임하였습니다.

 

부천군농회 의원 당선

부천군농회는 1926(대장 15)에 설립된 단체로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토지를 수탈함에 따라 농민들은 몰락하고 농촌경제가 파탄 납니다. 일제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농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명목상 농사법을 개량하고 뽕나무 재배, 고구마재배, 비료개량 등 여러 사업들을 시행하지만 결국은 수탈이 목적이었습니다. 부천군농회에 오정면 대표로 원해상과 함께 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193439일 조선신문)

 

면협의원 당선

면협의원은 면장이 하는 일을 협력 또는 견제하는 선출직으로 오정면의 면협의원 정원은 8명이었습니다. 한기학은 변영재, 이덕영, 이찬수, 이상수, 원용학, 고교현, 김준배와 함께 1935년 당선되었습니다. (1935525일 매일신보)

 

소사금융조합(素砂金融組合) 모범조합원 표창

일제는 부천군민의 약 7할이 농민이므로 이들의 금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부천군 내에 소사, 부평, 주안 등 3개의 금융조합을 만들었습니다. (193685일 동아일보) 이 당시 다수의 농민은 소작인들이었으므로 지주에게는 지주세, 부평수리조합에는 수세, 조선총독부에는 세금 등을 내야 했으므로 부족한 농사 대금을 빌리기 위해 금융조합을 이용하였습니다. 한기학은 소사금융조합 조합원으로 활동하며 모범조합원 표창을 받았습니다. (1937616일 조선신문)

 

농촌진흥공려회 표창과 수상식

일제는 농축산물의 생산 증진을 위해 각종 품평회와 표창을 진행하였습니다. 표창은 마을, 단체, 개인 등 다양하게 이루어졌는데 한기학은 19363월 소사진흥관에서 진행된 농촌진흥공려회 표창식에서 개인상을 받았습니다.

 

농촌진흥공려회 표창과 수상식
농촌진흥공려회 표창과 수상식

 

납세독행자 표창

1937211일 기원절 납세독행자 표창에서 인천세무서 관내 임재무협회장 표창을 받았습니다. (1937210일 경성일보)

 

소사오정방공단 고문 활동

일제는 19381029일 소사소학교 강당에서 소사면 과 오정 면 양면을 통합하여 방공단을 결성하는데 여기에 한기학은 고문으로 참여합니다. 부천 군수 장영한, 인천경찰서장 이뢰(二瀨) 등이 참여하였으며 이 행사는 내선일체를 이루고 황국신민을 만들기 위해 황거요배, 국가 합창 등이 진행되었습니다. (1938111일 매일신보)

 

황도유학 적극 참여

한기학은 황도(皇道) 유학, 즉 일제에 협력한 유림으로도 활동합니다. 1939117일 부평명덕회 결성식에서 제학으로 참여하였으며, 193912월 부천유도회에서 경리부장으로 참여하였습니다.

 

3. 각종 헌금

일제는 침략전쟁을 명목으로 각종 헌금을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소사신명신사 신역조영봉고제(1939.5.19.매일 신보)와 오정신사어조영(1940.11.7.매일 신보)이었는데, 여기에 지역조력자들이 기부금을 많이 냈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명목으로 헌금을 걷었는데 오정면에서는 1937년에 두드러집니다.

 

황군 위문금 명목 헌금

1937년에 시국 관련 구장회의를 개최하였는데, 회의 후 구장인 한기학은 510전의 헌금을 냈습니다. (193793일 조선신문)

 

오정면 각 구장 헌금 내용
오정면 각 구장 헌금 내용

 

비상시 대비 라디오 설치

오정면에서는 비상에 대비하여 라디오 설치하려고 했는데, 경비 때문에 실행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오정면 유지들이 자발적으로 거출에 참여하였는데 한기학은 5원의 헌금을 냈습니다. (19371021일 조선신문)

 

지나사변(支那事變) 이후 충후헌금 30(19371116일 조선신문)

 

4) 양력(陽曆) 확산

일제는 1939년이 되면 음력 대신 양력을 사용하기를 권고합니다. 음력에 익숙하고 우리의 전통에도 맞는 음력 대신 양력을 사용하라고 하니 반발감이 컸던 것 같습니다. 구장이었던 한기학은 종전의 지방 누습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양력을 확산시킵니다. (193922일 경성일)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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