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으로 보는 대일항쟁기 부천군 역사 - 42회

일제는 합병 이후 전국 각지에 신사(神社)를 세웠는데 신사에는 기본적으로 일본 황실의 조상신[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과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명치천황(明治天皇)을 주신(主神)으로 배치하였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통해 민족 고유의 종교와 신앙을 말살하고 더 나아가 민족성을 훼손시킴으로써 일왕에게 절대복종하는 황국신민을 만들려고 하였다. , 식민 지배를 용이하게 하고 더 나아가 내선일체를 완성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수단으로 신사를 이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부천에는 어떤 신사가 있었으며 일제는 이를 어떻게 활용하였을까? 일제는 1917, 부천군 계남면(후 소사면, 소사읍으로 개칭)에 소사신사를 그리고 1940년에 오정면에 오정신사를 세웠다. 소사신사에서 진행된 행사를 통해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부천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부평수리조합 준공식 및 보강공사 준공식

일제는 초기에 본토에 식량을 조달하는 기지로써 우리나라를 이용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를 강제로 몰수하였으며, 토지를 개간하고 수리시설을 만들어 수확량을 늘리려고 했다. 이러한 목적하에 대표적인 수리시설인 부평수리조합이 만들어졌다. 부평수리조합은 1923년에 설립인가가 났으며, 4년 만에 완성이 되었다. 준공식은 19261010, 소사신사에서 진행되었으며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참석할 정도로 성대히 치러졌다. (19261011일 경성일보)

1929712일에는 보강공사 준공식이 이루어지는데 여기에는 고다마[兒玉] 총감(總監)이 참석하였다. (1929713일 경성일보)

 

부평수리준공식
부평수리준공식

 

침략전쟁의 홍보와 지원병 모집

일제는 1937년에 중국 본토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게 된다. 이를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이로 인해 촉발된 비상시국(非常時局)이 지속됨에 따라 일제는 신사를 전시체제 아래 내선일체와 황국신민의 정신을 한층 더 고조시키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전승(戰勝) 기념

침략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각종 봉고제(奉告祭)를 진행하였다. 19371028일에는 상해(上海) 함락, 같은 해 1212일에는 남경(南京) 함락, 19381028일에는 한구(漢口) 함락 등 전첩 봉고제를 진행하였는데 이러한 행사에는 소학교와 보통학교 생도, 애향군인분회, 국방의회, 국방부인분회, 청년단, 면내 관공서 직원 등 다양한 단체 및 면내 유지들이 동원되었다. 일본의 승리가 곧 식민지 조선의 승리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었다.

 

각지의 지원 현황을 다룬 신문 기사
각지의 지원 현황을 다룬 신문 기사

 

지원병 모집 및 출발

일제는 침략전쟁으로 부족한 인적, 물적 자원을 우리 한반도에서 보충하였다. 특히 전쟁에 참여할 군인들을 모집하게 되는데 강제 동원된 병력은 지원병과 징병으로 구분된다. 지원병은 육군특별지원병령(1938222, 勅令 95)으로 시작되었고, 징병은 194441일부터 시작되었다.

부천군에서 지원병을 모집하는 기사는 많이 보이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군수가 직접 소학교에 가서 지원병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8대 군수 장영한은 인천경찰서장과 함께 소사북소학교에 출장하여 청년단원 50여 명을 소집하고 즉석에서 10명의 지원자를 받았다. (1939129일 매일신보)

또한 지원병을 모집하기 위해 1939211일 오후 3, 소사면 공회당에서 <지원병후원회 발회식>을 진행하였다. 회장에는 김동완, 부회장에는 수등정웅과 원인상, 이사에는 구장이었던 이성환 외 30, 상담역은 각 면장 각소학교장, 각주재소수석, 농사시험장 전매국 연구소장, 부천군 권업과장, 내무과장, 간사, 인천경찰서 경무 주임, 부천군청 신용식 군속 등 지역의 고위직과 지역유지 등이 함께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940년에는 인천과 부천이 연합으로 지원병 모집 운동을 하는데, 125일에는 문학소학교, 126일에는 소사북소학교, 127일에는 부평심상소학교 등을 순회하며 진행하였다. (1940113일 매일신보)

이렇게 모집된 지원병이 실제로 소사신사에 참배하고 부천에서 출발한 예도 있었다. 부천군 대부면 이승업(李承業), 소래면 안병희(安炳熙), 오정면 박승순(朴承順) 세 명이 대표적이다. (19401215일 조선신문)

부천군은 아니지만, 서울 경성고등상업학교에서 32명의 지원병이 모이는데 여기에 부천군 오정면 대장리에 사는 노부하라 미츠아키[延原光昭]가 지원병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1943115일 매일신보)

많은 청년이 지원병으로 가게 됨에 따라 전사자도 나오게 되는 안타까운 소식도 있다. 부천군 소사읍 구지리에 사는 타카모토 소오초오[高本曹長]의 전사 소식을 부모에게 전달하는 기사도 보인다. (1944830일 매일신보 )

 

부천군 소사읍 구지리 출신의 지원병 다카모토 군의 전사 소식
부천군 소사읍 구지리 출신의 지원병 다카모토 군의 전사 소식

 

각종 단체 결성식 및 기념식

소사 양 청년단 결성식

1938721일 소사신사에서 남청년단과 북청년단이 연합해서 결성식을 진행하였다. 15개의 식순으로 진행되었는데 개식, 국가, 황거요배, 국민정신 작흥, 초서 봉독, () 봉독, 황국신민 민서사제창, 옥관봉전(玉串奉奠), 단칙제정, 단장추천, 역원발표, 선언, 군연합 청년단장 고사(告辭)(장군수), 내친축사(소사면장, 수등 군인분회장, 좌등 순사부장), 천황폐하 만세삼창, 폐식 등 철저하게 일본식으로 이루어졌다.

 

소사 양 청년단 결성식 기사
소사 양 청년단 결성식 기사

 

소사방공(防共) 기념식

193985일 조선방공협회 창립 1주년 기념제를 소사신사에서 거행하였다. (1939816일 조선신문)

성전관철(聖戰貫徹) 선서(宣誓) 봉고제(奉告祭)

1941123일 오전 11시 소사신사에서 안동군수(8대 군수 장영한) 및 각 관공서 단체 학교생도 수천 명이 모여 성전관철, 기원봉고제를 진행하였다. (19411227일 조선신문)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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